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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호 2006년 1월] 기고 감상평

安重根의사를 `표절자'로 만들지 마라


 필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소년으로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어느 산중 마을로 피난을 가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고 산에서 나무를 하고, 때로는 가족 전체가 쑥을 캐어 쑥밥을 지어먹으면서 지냈다. 그보다 앞서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학교에서는 수업은 조그만 시키고 학교주변 논밭에서 일을 많이 했고, 심지어 산에 가서 죽은 소나무 뿌리를 캐야만 했다. 전투기에 쓸 기름을 짠다는 목적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서 가시가 돋는다'는 推句文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 모두 平亂이라고 하면서 농악단을 앞세우고 기뻐했다. 그 해 9월에 내게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산골마을에 서당이 문을 열었고 현 노인이라는 스승에게서 推句文이란 한문책을 배우게 됐는데, 이 책은 인륜도덕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일들을 해학적으로 표현해 빙긋이 웃으면서 공부를 했다. 더구나 평행구조라고도 할 수 있는 對句를 많이 쓰고 있음이 흥미로웠다.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해와 달은 하늘의 두 눈이요, 풀과 나무는 땅의 뭇털 이로다.' `달이 뜨니 하늘이 눈을 뜨고, 산이 높으니 땅이 머리를 들었도다.' `새가 소리를 지르는 것은 뱀이 나무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로다.' `개가 짖으니 손님이 문에 도달하였도다.' `사람이 술을 마시매 얼굴이 붉어지고, 말이 풀을 먹으매 입이 푸르더라.' `꽃은 웃어도 그 소리 듣지 못하며, 새는 울어도 그 눈물 보기 어렵도다.' `가느다란 비는 연못 가운데를 보고 알며 미풍은 나무 끝을 봐야 안다.' `퉁소를 부니 마른 대나무가 말을 하고, 북을 치니 죽은 소가 울도다(퉁소는 대나무로, 북은 쇠가죽으로 만드니).' `할아버지가 관을 벗으니 머리가 하얗게 드러나고 여자가 부엌에서 불을 피우려고 입으로 바람을 내니 입술이 뾰족해지도다.' `꽃은 다시 필 날이 있으나 사람은 다시 젊어지지 않는도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서 가시가 돋느니라)'였다.





金順信
(영어교육51입) 
아주대 명예교수



 李承晩대통령이 이 추구문에서 몇 문장을 인용해 담화를 발표했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다. 가령 `春水滿四澤이요 夏雲多奇峯이라(봄비는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 위에 가득하구나)' `家貧思賢妻요 國難思良相(집이 가난하매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매 어진 재상이 생각나는도다)' 그 외에 `人心朝夕變이요 山色古今同(사람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나 자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도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安重根의사가 옥중에서 붓글씨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고 썼을 때는 그와 내가 동시대인임을 느낄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가. 모두들 이 세상에서 맨 먼저 이 말을 한 사람이 安의사라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정말 그 위대한 말을 그가 처음으로 말했다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가. 그도 이 추구문을 공부하고 이 말에 너무 공감한 나머지 옥중에서도 휘호로 남겼으리라 믿는다. 그 붓글씨가 신문과 TV에서 발표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러니까 50년 이상 아무도 이 말의 출처를 바로 잡아주지 않아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드디어 몇 년 전 동양고전 강의로 명성이 자자한 D선생에게 묻기로 했으나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Y대학교 중국문학 교수로 있는 그의 부인의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은 솔직히 자기 남편도 모르니 일본에서 출판된 `廣辭苑'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하여 서초동 국립도서관에까지 가서 `荊棘'을 찾아봤으나 허탕을 치고, 할 수 없이 과거 미국에서 함께 공부한 중화민국의 친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천신만고 끝에 유명한 교수들에게 물어 이 명언과 함께 다른 명언, 즉 `一日不書, 百事荒蕪' `士大夫三日不讀書, 則 文理不交於胸中, 對 鏡視面目可憎, 向人欲語言無味(하루라도 글을 쓰지 아니하면 모든 일이 황무해진다. 사대부가 사흘만 책을 읽지 않아도 문리가 마음속에서 교감하지 못하고 거울을 보아도 얼굴이 가증스럽고 사람에게 말을 하고 싶어도 스스로 깨달은 어언이 무미하나니라)'를 宋나라 시대의 서예가이며 화가인 黃庭堅(호는 黃山谷, 1040~1105)이 쓴 사람이라고 알려줬다.
 필자는 우리 나라 한학자들까지도 이 글이 安의사의 말이라고 신문에 쓰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推句文을 공부한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닐텐데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安의사가 붓글씨를 쓰고 말미에 작게라도 `推句文에서'라고 인용했음을 적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입에 가시가 돋지 않도록 열심히 책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