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2006년 1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가난한 `유학생' 곤충 여행도 겨우 한번
필자는 1960년대 초에 대학생활을 보냈다. 대학에 입학한지 2주일만에 4 . 19혁명을 겪었고 일년 후에는 5 . 16군사정변을 치르는 혼란 속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든 물자나 환경이 여의치 못해 대학생활 그 자체도 쉽지 않았다. 나무를 어떻게 심는지에 대한 얘기로 시작된 식목일의 입학식도 특이한 출발이었다.
4 . 19혁명을 치르고 1학기를 다 끝내 갈 무렵인 7월 19일에는 농촌계몽에 앞서 도시민들이 농촌현실을 더 직시할 수 있어야 된다는 선배들의 설득으로 당시 농대 재학생 4~5백여 명이 여학생들을 앞세우고 도보로 서울까지 행진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해서도 여관 같은 곳에 갈 형편이 못 돼 당시 동숭동에 있던 문리대 교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해산했다.
당시 우리 나라 말로 된 대학교재는 거의 볼 수 없었고, 영어나 외국어로 된 소위 원서라는 책도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깊이 있는 공부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때였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인 1968년도에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됐는데, 당시 대만에서 유학 온 3명의 동료들은 이미 해적판의 원서들로 공부했던 것을 보고 많이 놀란 기억이 난다. 그만큼 그 당시 우리에게 원서란 매우 생소하기도 했지만 원서 사본들도 거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유일하게 구입한 원서가 곤충생리학(Insect Physiology) 책이었고, 그것이 인연이 돼 결국 필자 인생을 곤충생리학과 화학생태학 연구에 다 바치게 됐다.


夫庚生
(농생물60-64)
모교 농생명
공학부 교수
농업과학협회장
무성한 잡초 속에서도 작은 들꽃들이 피어나듯이 어렵고 급박한 가운데 대학생활을 보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즐거운 추억들도 있다. 농생물학과는 여름방학마다 식물병과 곤충을 채집하는 여행으로 교수님들과 함께 들과 산을 헤집고 다녔다. 당시 경비도 부담이 돼 여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친구들이 있어서 참여하는 동창들이 많지 못했다. 필자 역시 제주에서 온 `해외유학생(?)'이라 3학년 시절에 겨우 한 번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오신 두 분의 젊은 교수님들과 함께 대관령, 오대산, 강릉으로 채집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오대산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한 밤 중에 천막들을 거둬 월정사로 철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내와의 첫 만남 딸기밭 추억 생생
당시 서울대는 미국 미네소타대와 학술교류협정을 맺고 있었는데 주로 농대, 공대, 의대에 집중적으로 지원해 다수의 교수들이 유학 갔다 왔고 재정적인 지원도 많았다. 그 계획의 일부로 농대는 강의실과 기숙사가 새로 지어지게 됐다. 그래서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기숙사에서 일년을 보내게 돼 있어 기숙사가 우리의 생활 전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 기숙사 생활이 주변의 하숙집 생활보다 나은 면이 많았다. 그런 기숙사 생활의 일부로 매년 6월 딸기 철에 치르는 상록축제는 당시 학생들의 이성교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었던 일은 초청된 여학생 수와 농대생들의 숫자가 맞지 않으면 주변 하숙집이나 자취방에 누워 뒹굴고 있는 학생들을 동원해야 했다. 필자도 그런 경우로 지금 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거의 40년 인생을 같이 꾸려 나가는 행운을 얻었다. 지금 그런 추억이 서린 딸기밭들은 모두 낯선 도시 모습들로 대체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곳을 지날 때면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게 된다. 그렇지만 전문가로서의 생활과 값진 우리 부부인생의 출발점이 된 농대 4년의 기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진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