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호 2026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찾은 ‘르상티망’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곧 무력감과 좌절이 원망과 가치의 전도로 이어지는 심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찾은 ‘르상티망’

강명일(사법90) MBC 심의위원, 본지 논설위원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곧 무력감과 좌절이
원망과 가치의 전도로
이어지는 심리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넷플릭스로 정주행했다. 2004년 공전의 히트작이었지만 당시 아내의 출산과 육아로 미처 보지 못했던 작품이다.
하지원, 소지섭, 조인성 등 당시 신세대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특히 하지원은 무술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검게 그을린 피부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훤칠한 남녀 배우들과 발리의 시원한 해변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본질은 화려한 영상에 있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지나 등장한 이 드라마는 유난히 신분의 차이를 강조한다. 가난한 여행사 가이드 이수정(하지원)은 신분 상승을 꿈꾼다. 반면 미국 유학파 엘리트 강인욱(소지섭)은 재벌의 세습 권력에 반감을 품고 있다.
강인욱은 달동네 옆방에 사는 이수정에게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건넨다. 계급은 중세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며,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부유층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그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성공과 행복으로 믿는 현실. 드라마는 이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세 배우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했다. 그들이 성공했듯 386세대와 X세대도 정치와 기업, 언론과 법조,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을 무기로 권문세족에 도전했듯, 민주화와 전문성, 능력주의를 앞세워 기존 질서에 도전했던 이들이 이제는 사회의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좌든 우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다시 바뀌고 있다.
2022년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은 반복되는 출퇴근과 무기력한 일상에 지쳐 있다. 하루 몇 시간씩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해 주지 않는다. 결국 남자 주인공에게 말한다. “날 추앙해요.”
2004년 ‘발리에서 생긴 일’의 갈등이 돈과 계급, 신분 상승의 문제였다면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무가치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더 글로리’, ‘마스크걸’을 거쳐 2026년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 이르기까지 최근 드라마에는 타인의 성공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 굴욕, 자기부정이 짙게 배어 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곧 무력감과 좌절이 원망과 가치의 전도로 이어지는 심리다. 물론 모든 분노가 르상티망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이 감정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인간의 능력과 노동의 가치마저 새롭게 평가받는 시대다. 계급 갈등은 이제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인간 존재의 가치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다음 변화는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원망과 갈등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사회가 마주한 새로운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