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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호 2026년 10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공대생 시키면 된다?

“1959년 원자핵공학과 설립 이래 7번째 여학생으로 입학”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공대생 시키면 된다?

이나영(원자핵91)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원장
 
“1959년 원자핵공학과 설립 이래 7번째 여학생으로 입학”
 
시간은 기억을 순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옛날 생각을 하면 웃음만 나는 걸 보면. 

나는 1991년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1959년 학과 설립 이래 7번째로 입학한 여학생이었다는 것을. 덕분에 입학도 하기 전에 연극반에 들어가 2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연극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들어보니 선배들이 과에 여자후배 들어왔다고 자랑을 했다가 차출이 되었다는데, 정작 맡은 배역은 남자 배역이었다. 

92년에는 4.19 마라톤을 뛰었다. 전교생이 과별로 줄맞춰 뛰는 것이었는데, 당시 대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신림역에서 꺾어져서 서울대입구역을 거쳐 다시 대운동장 돌아오는 나름 긴 코스였다. 뛸 자신 있는 사람은 앞에서 뛰라 해서 앞에서 뛰었고 그리 무리한 거 같지 않은데 여자 중 3위로 들어왔다고 상도 받았다. 원자력학과가 있는 4개 대학이 참여한 전국 원자력마라톤대회를 두 번 뛰어 두 번 다 여자부 1등을 하기도 했다. 물론, 혼자 뛰긴 했지만.  

최근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트리가 마크II 라는 연구로가 있다. 지금의 원자력 강국인 한국을 만든, 최초로 도입된 연구로였는데, 당시에는 낡은 연구로로 실험수업을 하기 위해 관악에서 공릉동까지 매주 가느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우리 다음 학번부터는 ‘최신 연구로’가 있는 원자력연구원에서 실험한다고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돌이켜 보면 우리 학번이 영광스럽게도 전설이 된 트리가 마크II로 실험을 했던 마지막 학번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철거해서 찾을 수 없는 32동과 33동, 34동으로 둘러싸인 붉은광장(?)을 배경으로 졸업식 때 동기들과 찍은 사진. 


대학원생이 되고 학부생 실험 조교를 맡았다. 한 학기에 원자로 개념을 이해하면서 쉽게 해볼 수 있는 실습 주제를 3개 선정했는데, 내가 담당하게 된 것은 3축 모터 구동을 컴퓨터만 가지고 작동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컴퓨터로 신호를 생성하고 AD 컨버터, 모터, 축 등을 이용하기로 했고, 필요한 기자재를 구로 공구상가에서 구입했다. 당시 업체 사장님이 3축을 구동할 수 있는 비싼 전용시스템을 추천하시면서 컴퓨터로 3축 구동은 못할 거라며 만들어오면 사주겠다고 하시기도 했다. 실험기자재비가 제한적이었기에 할 수 있다고 우기면서 기초 재료들을 잔뜩 구입했다. 

문제는 386 컴퓨터를 가지고 프로그래밍을 해서 모터 구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요즘같이 똑똑한 생성형 AI가 있었다면 몰라도 당시는 넷스케이프라는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며칠 밤을 새서 결국엔 구동에 성공했고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학부생 그룹별 실습을 했다. 한 달간의 시간을 주었는데, 학생들이 진심이었다. 한 달간 학부생들이 집에도 안가고 공장형 실험실 여기저기에서 쪽잠을 자며 실험을 했다. 밥도 거르고 실험에 진심인 후배들을 위해 가성비 좋은 간식들을 사다 나르며 같이 밤을 새고 실험을 도왔다. 덕분에 모두 실험에 성공을 했고, 우리는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공대생 시키면 된다. 

추억을 꺼내자니 너무 많은 기억들이 튀어 오른다.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옛날 얘기는 금물, 라떼 소리를 듣게 되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지금은 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모여 우리끼리 옛날 얘기하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