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호 2026년 10월] 문화 나의 취미
“그림 그리고 소설 쓰고 무대 서고…일단 하고 봅니다”
선 긋기부터 시작, 개인전 9회, 창작서 배운 경험 법학 연구로
“그림 그리고 소설 쓰고 무대 서고…일단 하고 봅니다”

정연덕 동문이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에 걸린 작품 ‘숨’ 앞에 서 있다. 코로나19 시기 답답함을 겪던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한 마음이 담겼다.
정연덕(전기전자제어93)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선 긋기부터 시작, 개인전 9회
창작서 배운 경험 법학 연구로
“이건 뭘 그린 것 같아요?” 단풍을 그린 그림인 줄 알았다. 정연덕(전기전자제어93·사진)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오르내리는 주가와 투자자들의 희비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콘크리트 너머를 바라보는 그림은 출제위원으로 외부와 단절돼 지낸 경험에서, 다른 그림 속 집은 그가 직접 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곳이었다. 10월 1일 건국대에서 만난 정 동문이 작품을 짚을 때마다 화폭 너머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혼자 생각해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냥 혼자 노는 거예요.”
그렇게 ‘놀며’ 미술 개인전을 아홉 차례 열고, 단편 네 편을 묶은 소설집 ‘화양연화 1434’를 펴냈다. 단편영화 다섯 편에 출연하고 연극·뮤지컬 무대에도 섰다. 작사·작곡한 음원을 발표하고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연극은 건대 앞에서 수강생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보고 등록했다. “할까 말까 하면 일단 해요.” 이 많은 취미의 출발점에는 전공인 지식재산권법이 있었다. 정 동문은 “웬만한 문화와 예술은 저작권법에 다 들어간다”며 “연구하며 접한 창작 활동을 직접 배워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일단 시작하면 배우는 데 진심이다. 마흔을 넘겨 뮤지컬을 배우러 갔을 때는 선생님이 어깨를 두드리며 빵을 건넸다. 교수인 줄 모르고 나이 들어 고생한다며 성공을 기원해 줬다. 연극에서는 구르라면 바닥을 구르고, 울라면 울었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요.” 그때 익힌 발성과 복식호흡은 지금도 매주 배우는 판소리에 도움이 됐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발림에는 연기를 써먹었다.
그중 그림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인 취미다. 2005년 뉴욕대 로스쿨 유학 시절 찾은 미술관에서 교과서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들을 마주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앙리 루소의 그림에선 마치 그림이 손짓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도 달라졌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말을 거는 느낌이 있어요. 그때부터 언젠가 직접 배워보고 싶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학원을 찾은 것은 2017년 무렵. 한 시간씩 선을 긋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후 학원 네댓 곳을 다니며 유화와 아크릴화, 동양화와 민화, 판화까지 익혔다. 색을 잘 쓴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재미를 붙이는 데 한몫했다. 정 동문은 “계속 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신 건지는 모르겠다”며 웃었다.
코로나19 기간에는 그림에 쏟는 시간이 더 늘었다. 정해진 것 없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작품을 곁에 둘 수 있어 좋았다. 2021년 첫 개인전은 준비 방식부터 남달랐다. “남들은 전시회를 하려고 그림을 그리는데, 저는 전시회부터 잡아놓고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들에게 오라고 했으니 이제 그릴 수밖에 없었다. 한두 달 밤낮으로 작업했다. 막판에 그린 유화는 전시장에서도 물감이 마르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날부터 이틀 동안은 거의 쓰러져 잔 것 같아요.” 해냈다는 자신감은 다음 전시로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국립미술관과 튀르키예 앙카라 한국문화원, 도쿄도 미술관의 ‘젠’ 전시에도 참여하며 작품을 선보이는 무대를 넓혔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학교에 기증한 ‘숨’. 코로나19 시기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답답함에 치열한 학업 부담까지 견뎌야 하는 로스쿨 학생들을 생각하며 그렸다. 잠시라도 숨을 돌릴 여유를 전하고 싶었다. 일상에서 얻은 소재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었다.
작품에 드는 시간과 수고를 몸소 겪으니 작가들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 특히 지식재산권법을 전공한 그에게 계약을 잘 몰라 작품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작가들의 사정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법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이라며 “무대 위에서 타인의 삶을 연기해보고, 예술 작업을 통해 감정을 직면해본 경험은 판례를 읽는 눈을 달라지게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AI 앞에서 자신만의 표현을 고민한다. 정 동문은 이번에도 직접 배우며 답을 찾고 있다. AI로 그림과 영상을 만드는 법을 익혔고, 이번 학기에는 AI 창작을 다루는 교양 강의도 열었다. 올해 펴낸 ‘창작 본능’에는 AI 시대 창작자가 살아갈 길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열 번째 개인전은 내년을 생각하고 있지만 일정은 정하지 못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오히려 시작이 조심스러워졌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막 했는데, 많이 알면 겁이 나서 잘 못해요.” 그래도 무엇을 그릴지 궁리하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새 만화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어린 날처럼, 그에게는 내일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나이가 들면 그런 설렘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미술을 하면 ‘내일 뭘 그리지?’ 하는 게 있어요.” 이정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