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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2026년 9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내 몸 재난 보고서 

더딘 회복서 세월의 무게 절감, 반깁스했지만 약속 장소 나가
내 몸 재난 보고서 


하임숙(영문91)
채널A 비즈니스기획본부장
본지 논설위원

더딘 회복서 세월의 무게 절감
반깁스했지만 약속 장소 나가
 
6월 초, 엄마를 모시고 언니들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대구에, 울산에, 파주에, 서울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5모녀가 1년 만에 나선 여행길이었다. 언니가 많은 집이라 큰언니, 작은언니 부르고 나니 호칭이 애매했던 ‘꼬마언니(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키가 고만고만했다)’는 여행 내내 내 얼굴을 보면 낄낄댔다.

“바둑이 같아.”

오른쪽 눈 주변부터 광대뼈 인근까지 큰 멍을 달고 있던 나는 실제 점박이 바둑이 같았다.

여행 2주 전에 넘어졌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 들고 처음 가는 식당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새로 산 뒤 세 번째 신었던 운동화의 바닥이 너무 딱딱한 플라스틱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길바닥 배수관 빗물받이를 못 보고 함부로 내딛은 탓이었을까. 누가 옆에서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꽈당 넘어졌고, 손을 짚을 새도 없이 얼굴로 바닥을 강타해 한 번 튀어 오르기까지 했다.

벌떡 일어났다. 혹시라도 본 사람이 없는지 주변부터 살폈다. 비가 제법 오는 저녁 7시 무렵이라 행인이 별로 없었다. 다행이었다.

눈 주변이 너무 아팠다. 어른 손만 한 피멍이 든 허벅지와 근막에 문제가 생겨 항생제를 먹어야했던 팔꿈치는 다음날에야 아픈 걸 알았다. 손거울로 살피니 눈썹뼈와 광대뼈 인근이 심각하게 부풀어 올랐다. 흡사 ‘제리’를 쫓아가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큰 혹 덩어리를 달고 만 ‘톰’처럼.

잠시 고민했다. 약속을 취소하고 응급실을 가야 하나. 하지만 3인이 만나기로 한 그 자리는 친해지고 싶은(말하자면 아직 친하지 않은) 어르신이 있는 자리였고, 나머지 1인은 1시간이 지나서야 합류한다고 했다. 얼굴 근육을 움직여봤다. 일단 뼈는 다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 앞머리 덕분에 부풀어 오른 혹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갔다.

술을 마실까 말까 또 고민됐다. 혹시라도 뇌졸중으로 머리가 어지러운지 술 때문인지 판단하지 못하면 어쩌지? 20분쯤 지나자 괜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지나치게 마시지만 않으면 뭐…. 2차까지 가서 밤 11시 반에 헤어졌다.

여행을 다녀온 뒤 성인 발레 교실에 등록했다. 길가다 괜히 넘어진 건 근력이 부족해서니 속근육을 키워보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마침 친한 선배가 발레핏을 해보니 근육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 귀가 팔랑거렸다. 틈 날 때마다 발레를 했다. 점심 저녁 약속이 대체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나는 틈이라는 게 일주일에 한두 번에 불과했지만.

재미있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쓸 일이 없는 근육을 쓰고, 동작을 해보니 몸 쓰는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됐다. 정원 8인의 수업은 어느 시간대를 가더라도 발레 복장을 완전히 갖춰 입은 여성들로 꽉 찼다. 세상에, 내가 술로 만든 세상에 사는 동안 근육과 자기 개발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딱 한 달 반 뒤, 왼쪽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 발레 강사가 시킨 점프 동작을 하던 중이었다. 다음 날 방문한 병원에서는 반깁스를 시키며 운동을 엄금했다. 답답한 마음에 세포 재생에 도움을 준다는 PDRN 주사도 몇 번 맞았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올해 초 콜레스테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들었던 우울감이 다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우리 나이에는 함부로 뛰면 안돼요”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뭐야 그럼 숨만 쉬란 말이야? 억하심정이 차올랐다.

그렇게 한 달여 남짓. 여전히 반깁스 신세다. 고장 난 몸이 잘 치료되지 않는 것으로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고 있다. 단지 반깁스를 훈장처럼 달고 만난 사람들로부터 “약속을 취소하지 왜 나왔냐”라는 말을 들으며 그래도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노라 정신승리하는 중이다. 이상이 마음만은 청춘인 50대  중반의 ‘내 몸 재난 보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