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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호 2005년 1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소장품,건물 규모 모두 선진국 수준 이뤘어요"


李健茂 국립중앙박물관장 본보 朴聖姬논설위원(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지난 10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이 9만여 평의 용산 부지에 세계 여섯 번째 규모의 초대형 박물관으로 건립돼 개관했다. 개관 전부터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아왔던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직후 수많은 인파가 몰려 한국 문화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박물관 기능의 외연을 확대해 극장 `용', 어린이박물관 등을 열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개관 한 달째를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李健茂(고고인류65 ­69)관장을 만나 용산 부지로의 이전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 보았다.  - 광복 60주년인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 60돌을 맞아 새 보금자리로 옮겼습니다.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사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번듯한 건물 없이 운영돼왔기 때문에 외국 박물관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온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4천1백억원 이상을 들여 지은 건물이 있으니 박물관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됐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나라는 무역규모로 보아도 세계 11대 국가 중에 하나입니다.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는데 그에 맞는 박물관 건물을 우리도 갖는 게 마땅하겠죠. 국민들께서도 그런 자부심 때문에 우리 박물관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공모를 통해 임용되시고 또 1급에서 차관급으로 승격하시어 새 박물관 건립의 대 역사를 이루셨는데.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지위가 격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각계 특히 문화계에서 높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제 때부터 차관급으로 격상됐는데 한결 더 책임이 막중해졌죠.  그러나 저는 비록 광주박물관장을 맡은 적도 있었지만 사실 학예 분야에서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관장의 역할보다는 학문연구가 제게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관장 공모에 응했던 것은 새 박물관 건립 등의 당면한 큰 사업들이 있었기 때문에 외부 인사들보다는 업무 현안이나 직원 파악에 빠른 내부 사람이 새 관장에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직원들도 그런 의견을 주었고요.󰡓 [ 언제나 찾아와서 천천히 관람하길 미군 헬기장 이전문제 가장 어려워 ]  - 많은 예산을 들인 건물 건립과 이전 문제 등으로 여러모로 고민도 많았고 어려움도 따랐을 텐데.  󰡒새 박물관 개관이 제게 맡겨진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에 제대로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각오로 일했죠. 성공적인 개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유물 이전문제와 미군 헬기 착륙장 이전 문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난관에 봉착했던 것은 역시 미군 헬기 착륙장 이전 문제였죠. 국민들하고도 2005년 10월에 개관한다고 이미 약속한 상태였는데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 못하면 박물관 정문이 있어야할 자리에 헬기 착륙장이 있었을 상황이 벌어질 뻔한 거죠. 다행히 지난 5월 1일 그 부지를 인수했어요.  유물 이전문제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죠. 전 직원들이 전부 동원됐으니까요.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 현재 소장품 수량은 어느 정도이며 이중에 얼마가 전시되고 있는지.  󰡒약 15만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중에 1만1천여 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전 박물관보다는 두 배 가량 전시품목을 늘렸습니다.󰡓  - 소장품 중 일부만 전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박물관은 소장품들 중에 일반인들이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고 관심을 끌만한 유물들을 택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굳이 일부러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비슷한 유물은 순환해서 전시하고 있죠. 사실 소장 유물들이 전시를 위한 것보다는 연구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이 상당부분이기 때문에 전시 품목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을 수도 있을 겁니다.󰡓  - 공사가 잘 마무리돼 성공적인 개관을 하셨는데 공사 기간 중 제일 어려웠던 점은.  󰡒민감한 유물들을 보관해야하는 곳이니 건물을 지으면서도 신경 써야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수장고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제대로 만들어야 했고 진열장 배치 등에도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첨단 영상장비 갖춰 감상효과 극대화 새로운 문화상품 개발․경영혁신할 터]  - 수장고가 전에는 지하에 있어 걱정이 됐는데 이번에는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앞에서 보면 지하 1층처럼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지상 1층입니다. 결국 지상으로 올라온 거죠. 수장고가 지하에 있으면 유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결로 현상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벽도 이중으로 했고 공조시설과 조습 패널을 붙여 습도를 자체 조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장고는 누가 봐도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좀더 완벽한 박물관 건립을 위해 직원들을 해외에 많이 보낸 것이 박물관 건립에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 개관 후 아쉬운 점이나 보완해야할 점도 눈에 띄었을 텐데.  󰡒관람객들이 예상보다 많아 대비 못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단체 관람객들이 마땅하게 들어가 식사할 만한 곳도 부족해 간이 식당을 만들어 보충하고자 합니다. 또 관람객들이 버린 쓰레기들 때문에 매일 청소하기도 힘듭니다. 관람문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서 힘든 부분이겠죠. 그러나 처음보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것, 음료수 병을 들고 들어온다든지 하는 것만 주의해줬으면 합니다. 중요한 회화나 직물류 유물은 카메라 플래시 빛에 약합니다.󰡓  - 적정 관람인원은 몇 명 정도가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동시 체재 적정 관람인원을 3천명 정도로 산정했습니다. 하루 총 적정인원은 약 1만명 정도 됩니다. 그러나 평일에 1만6천명 정도, 주말에는 3만명 정도가 관람하고 있으니 그 만큼 쾌적한 관람이 되고 있지를 못합니다.󰡓  - 하루에 가장 관람인원이 많았을 때는.  󰡒주말에 4만명이 넘게 오셨을 때가 있었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다 수용하셨는지.  󰡒유물 보호와 쾌적한 관람을 위해 무료지만 티켓을 제한해서 발부하는 방법으로 관람 인원수를 제한했습니다. 직원들이 직접 관내 혼잡도를 체크해 일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들여보내는 방식을 썼죠.󰡓  - 왜 그렇게 관람객들이 많이 몰린다고 생각하시는지.  󰡒주 5일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큰 돈 안 들이면서 볼만한 것을 찾다보니 박물관을 찾게 되고 또 요즘 청계천이 인기 있는 이유도 그것 아니겠습니까.󰡓  - 연표와 설명 등에서 오류 및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등의 의견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부 역사학자 분들께서 그런 문제를 지적해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박물관은 아직 역사 박물관은 아닙니다. 총독부 박물관이 광복이 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바뀌고, 다시 덕수궁미술관(옛 왕실박물관)을 흡수 통합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됐기 때문에 고고품과 미술품 중심의 박물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내용하고 고고학적인 내용하고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국사학을 하시는 분들의 지적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의견을 수용해서 연대 표기를 수정하긴 했지만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향후 우리 박물관은 역사 박물관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역사부가 설치돼 있고 역사관이 꾸며졌죠. 이를 더 발전시켜 계속 자료를 구비해 성숙되면 역사 박물관으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아직 15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갖춰진 모습인데 소프트웨어적인 운영 면에서 새로운 것들이 요구되고 시도해야할 필요성도 느끼실 텐데.  󰡒외국 유명 박물관에 비해 소장품수가 적기 때문에 우리 박물관이 상대적으로 열세인데 이를 만회하고 앞서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도입한 MP3 플레이어와 PDA 시스템 등은 정말 최신 운영기기이죠. 특히 영상패널을 많이 도입했는데 지금은 빠르게 보는 시대이기 때문에 영상을 통해 많은 작품들과 친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봅니다.  또 프로그램을 자주 새로운 것으로 개발하고 다양한 외국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문화재를 좀더 잘 관람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텐데.  󰡒저희들이 관람의 편의를 위해 꼭 봐야할 `50선', `100선' 등으로 유물들을 표시해놓았지만 이런 방법보다는 아무 때나 와서 머리를 식히며 천천히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본만큼 더 보인다고 찬찬히 감상하다보면 재미를 느끼시게 될 겁니다. 전시실이 총 6개로 고고관, 역사관, 아시아관, 미술1관․2관, 기증관 등이 있는데 오실 때마다 한 관씩 택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유료화는 언제부터 시작되고 입장료는 얼마가 될 예정인가요.  󰡒내년 1월 1일부터입니다. 어른이 2천원이고 중․고등학생이 1천원, 어린이는 5백원입니다. 이전 전에는 청소년은 무료였고 어른은 7백원이었습니다. 몇 배 오른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크게 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입장료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수렴했었는데 3천원을 받자는 의견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족이 와서 관람할 때 교통비, 입장료, 식음료 비용을 총 합쳐 2만원을 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최종적으로 입장료를 결정했습니다. 또 어린이는 무료로 하려고 했으나 유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게 하려는 의미로 요금을 받기로 했죠.󰡓  - 전공 선택은 어떻게 하셨는지.  󰡒사실 특별한 이유 없이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공부하면서 많은 흥미를 느껴 열심히 했어요. 선생님 따라 답사도 다니고 지표 조사도 하면서 늘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상당히 재미가 있었어요. 공부는 역시 재미가 있어야 열심히 하게 되니까 재미가 중요하죠.󰡓  - 형님(李長茂 기계공학63 ­67․모교 공대 교수)께서는 공대를 졸업하셨네요. 그런데 대개 보면 한 집안에서 가족끼리 비슷한 전공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이렇게 전공이 나뉘어졌나요.  󰡒할아버님(李丙燾 대학원52졸․前문교부 장관)은 국사학을 공부하셨는데 아버님(李春寧 농학36 ­39․모교 명예교수)은 이과를 공부하셨습니다. 형님은 아마도 아버님을 본받아 이과계통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 박물관에 몸담으시면서 유적 발굴과 연구를 지속해오셨는데 보람이 있었던 점은.  󰡒저는 비교적 발굴 운이 좋았습니다. 그동안 중요한 유적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선사시대 목관을 비롯해 붓과 칠기 등 최초라고 수식이 붙은 발굴을 많이 했죠. 서울 암사동 유적도 기억에 남는 발굴 중에 하나였어요.󰡓  - 그동안 청동기만 연구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 박물관에 들어왔을 때 선사시대 청동기전을 열었죠. 그런데 석기와 철기 사이에 청동기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고 마구 진열돼 있었는데 그만큼 청동기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역사기록도 적었던 시대였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동기를 공부하다보니 역사를 새로 쓰는 재미도 갖게 됐죠.󰡓  - 청동기 유물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청동기 때 종교 의식에 사용됐던 `청동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원시 종교와 연관돼 있고 북방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죠. 제작 방법이 상당히 어려운데 지금도 그 제작 기법을 밝혀낼 수 없어요.󰡓  - 국내 고고학계엔 `건백지교(健白之交)'라는 말이 있다고 하죠. 건(健)은 李관장님을 칭하고 백(白)은 李白圭(고고인류65 ­72) 경북대 교수 겸 한국고고학회장님을 일컫는다고 들었습니다. 두분 사이를 간단히 소개하신다면. 그밖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분들이 있다면.  󰡒같은 학번으로 늘 같이 붙어 다녔어요. 또 李白圭교수가 대학으로 떠날 때까지 박물관에서도 같이 일하고 발굴도 같이 다녔으니 좀 오래된 사이죠. 그리고 그 때 동기들하고는 자주 만납니다. 65학번 동기끼리 `이금회'라는 것을 만들어 매달 두 번째 금요일에 정기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인원은 10명 정도 되는데 금융계에 종사했던 동기들은 거의 은퇴했고 前보건복지부 차관을 하고 현재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인 李鍾尹씨, 전남대 인류학과 崔 協교수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문화계 인사 중에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제대로 뵙지는 못했지만 백남준 씨를 평소 존경해왔습니다. 남이 개척하지 않은 분야에서 평생 매진해온 그런 분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전위 예술을 통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평생 한 길만을 가신 백남준 씨 같은 분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 호가 溪山이시죠. 어떤 계기로 만드셨는지.  󰡒경주에 사시는 한 향토사학자 분께서 지어주셨습니다. 할아버님의 호 斗溪의 溪에서 뫼 山자를 붙인 거죠.󰡓  -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고 계신지요.  󰡒테니스를 즐겨합니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테니스를 하려고 합니다. 저녁 때 직원들 중 테니스를 좋아하는 직원들하고 같이하고 있는데 한 몇 십년 된 것 같습니다. 다른 특별한 운동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 골프는 안 하시는지요.  󰡒공무원의 신분으로서 골프를 한다는 게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안하고 있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기도 하고요.󰡓  - 한때 일어났던 서울대 폐교론과 논술고사 논란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서울대 출신들이 남을 배려하는 부분이 좀 적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도 자성할 부분이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폐교론을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남보다 앞서 진출하다보니 그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같이 사는 사회이니 남들에 대한 배려를 좀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정부나 사회에서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꼭 서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논술고사 문제는 서울대 내부 실정도 있을 테니 그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현 정부의 문화 정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전반적인 면을 본다면 역시 자율이라고 봅니다. 각 문화 단체가 자율을 지향하도록 하면서 정부에서 지원하는 형식, 이것이 꼭 문화정책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참여 정부의 정책 기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도 공사립 박물관을 지원하고 있어 정부 정책과 방향을 같이 하고 있는데 정부는 제도의 모순점이 있는 부분들만을 체크해 수정하고 지원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 지원하는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렵고 힘든 부분들을 찾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반적인 문화 정책의 기조라고 봅니다.󰡓  - 국보 1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화재위원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국보 1호인 남대문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모든 위원들이 국보 1호라는 지정번호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비춰졌는데 단지 관리 번호에 불과하다는 것과 남대문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재라는 것을 적극 알리기로 했습니다. 남대문은 서울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유산이지만 언제나 일제 청산문제와 겹쳐 논의되니 마치 일제가 만든 것처럼 인식될 정도가 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개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데 더욱 책임이 막중하시리라고 생각되는데 앞으로의 중장기 계획은.  󰡒현재 우리 박물관의 중장기 계획은 이미 안이 만들어져 확정단계에 와 있습니다. 기본적인 박물관의 업무인 문화재 보전, 관리 등의 업무는 당연히 지속될 사항이며, 앞으로 연구 활성화를 통해 더욱 더 많은 성과를 내어 교육 또는 전시에 반영될 수 있도록 더욱 매진하려고 합니다. 국제교류의 활성화에 대한 방안도 확정안을 짜놓은 상황입니다.  또 향후 박물관의 모습이 어떻게 진전될지 모르겠으나 경영면에서 한층 도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 단계는 시험단계라고 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좀더 문화 상품을 많이 개발하고 시설관리를 혁신시킬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고 지원 예산도 어떻게 하면 덜 쓰면서 운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안을 찾아야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관람객들이 많이 찾아 주시니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 은퇴하신 뒤의 계획은.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아직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그동안에 한 공부가 제게 썩 흡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 학술적으로도 늘 좋은 성과를 올리시고 또 성공적인 박물관 건립과 개관을 이루셨는데 그동안 자신의 활동에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어떤 것인지.  󰡒그동안 제 활동에 운이 많이 따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개관을 하는 데에도 만약 태풍이 불었다면 연기가 불가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태풍도 피해가서 제 때 개관을 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줘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 게 모두 제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운이라는 것이 늘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렇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제가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집에 불단을 만들어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늘 기도하는 것도 큰 힘이 됐다고나 할까요.󰡓  - 총동창회에서 마포에 장학빌딩 건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원을 보내주고 있는데.  󰡒총동창회 林光洙회장님을 비롯해 여러 임원들 그리고 많은 동문들께서 신관 건립을 위해 노력해오고 계신데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동문들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하는 이런 중대한 일에는 역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분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리=朴宰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