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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호 2026년 8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황혼 녘에 부르는 학우 이름, 김재곤 심희섭

황혼 녘에 부르는 학우 이름, 김재곤 심희섭

이경준(임학63) 
서울대 산림과학부 명예교수 
 
나는 해방 전 이북에서 태어나 격동의 시기를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이제 인생의 황혼 녘에서 평생 가슴 한구석에 그리움과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던 월남전 전사 학우들의 이야기를 용기를 내어 글로 옮겨본다.

풍파의 시대를 타고나 청춘의 푸른 날개를 채 펴보기도 전에, 우리 세대는 시대의 준엄한 부름 앞에 서야 했다. 시대는 서늘했고, 역사의 비장한 무게는 고스란히 젊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누군가 책을 들고 강의실로 향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총을 든 채 낯선 전장으로, 심지어 이국땅의 사선(死線)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길 위에서 바쳐진 청춘들의 피와 땀, 눈물겨운 희생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를 지탱하는 거대한 주춧돌이 되었다.

나도 국방을 위해 이바지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재학 중 공군 사병으로 입대했는데 김신조 사건으로 인해 제대가 연기되어 무려 3년 5개월을 복무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백령도 최전방에서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파도를 바라보며 젊은 날을 보냈다. 의무 병과를 부여받아 병원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군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 속에서도 긴장과 고립감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제대 후 복학했을 때, 시대는 또 다른 의무를 요구했다. 교련(敎鍊)이라는 새로운 필수과목이 생겨, 이미 군 복무를 마친 몸으로 다시 2년간 매주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졸업 직후 교련은 군필자에게 면제되었지만, 나는 그 혜택을 받지 못했다. 마치 역사의 굴레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듯, 군복의 냄새가 오래도록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향토예비군에 편입되어 35세까지 복무했다. 이후 복무 연한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나는 더 오래 충성을 할 수밖에 없는 세대였다. 이어서 직장에서는 민방위대에 편성되어 당시 기준인 50세까지 의무를 다했다. 내가 복무를 끝내자마자 연한은 45세, 그리고 지금은 40세로 줄어들었다. 나는 혜택을 받지 못한 세대였어도 20세부터 50세까지 쉼 없이 국방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기록은 월남전에서 목숨을 바친 친구들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농대 임학과 63학번, 부산고등학교 출신 김재곤(金在坤). 그는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 조용하면서도 의협심이 강한 성격으로 학우들의 신망을 받았다. 1965년 육군에 지원 입대해 맹호부대 수도사단 1기갑연대 8중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 1966년 10월 4일 빈딘성 푸캇군 산악 밀림에서 당시 최대 규모의 대대급 수색, 매복, 동굴 소탕작전이었던 ‘맹호6호작전’ 중 그는 분대장으로 앞장서 나아가다 적의 부비트랩에 걸려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고 하사로 특진한 그는 지금 국립서울현충원 48-1-395 묘역에 잠들어 있다.


김재곤 학우의 유일한 기록: 1964년 10월 말경, 강화도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 우측에서 세 번째가 1966년 베트남 빈딘성 맹호6호작전에서 전사한 고(故) 김재곤 병장(하사 특진)이다.
 


또 다른 친구, 수의학과 63학번,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출신 심희섭(沈熙燮). 그는 ROTC를 그만두고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여 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제1중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 1966년 8월 24일 빈딘성 퀴논 북방에서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양호작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재곤이보다 늦게 입대했지만, 더 먼저 목숨을 바쳤으며, 재곤이 근처 48-1-361 묘역에 묻혔다. 두 친구 모두 일류 고등학교 출신으로 농대 기숙사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며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던 동기였다. 그들은 남다른 애국심으로 기꺼이 월남전에 참여했고, 조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산화했다.

나는 수년간 재곤이의 행적을 찾기 위해 애썼고, 마침내 국립묘지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임학과 동기들과 함께 그의 묘비 앞에 서서 “너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어.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굳건한 초석이 되었고, 북한의 도발을 억제했으며, 결국 공산주의의 붕괴를 앞당긴 고귀한 희생이었어”라고 외쳤다. 그 순간 바람이 묘역의 소나무 숲을 흔들었다. 마치 그의 영혼이 우리 곁에 와 있는 듯했다. 우리 가슴엔 재곤이의 피와 눈물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대에는 관악캠퍼스 문화관 로비 벽면에 ‘서울대학교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 추모비’(명판)가 1996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늦게나마 설치되었지만, 서울대 출신 월남전 전사자는 아직도 그 명단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민주열사 추모비는 캠퍼스 곳곳에 세워져 있으면서도, 국가 안보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학우들을 위한 추모탑은 아직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대가 지성인의 집단이라면 말뿐인 보훈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몰장병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충혼탑 건립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던 젊은 영혼들에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헌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