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81호 2026년 8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30년 된 코트 입고, 20년 경차 타며 3600명에게 장학금

학봉장학회 대 이은 20년, 교육 사각지대 넘어 한일 교류로
30년 된 코트 입고, 20년 경차 타며 3600명에게 장학금

이연현(법학78) 학봉장학회 이사장
 
학봉장학회 대 이은 20년
교육 사각지대 넘어 한일 교류로

한 학생의 1년 치 급식비, 30만원. 학봉장학회의 첫 장학금은 거창한 인재 육성의 구호보다 아이가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하는 데서 출발했다. 적어도 밥값만큼은 보태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장학사업은 스무 해 동안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천 명에게 닿았다. 7월 25일 강남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이연현(법학78·사진) 학봉장학회 이사장은 “급식비를 못 냈다고 밥을 먹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학생들이 밥은 먹게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학봉장학회는 올해 제20회 장학증서 수여식을 열었다. 첫 수여식 이후 3672명에게 총 15억 4658만원을 지원했으며, 올해도 화순과 서울에서 385명에게 1억 6375만원을 전달했다. 모친 조행자 여사와 아내 고 이문 여사, 이 이사장을 포함한 가족의 출연액은 총 49억원이다.

그러나 그는 장학사업의 의미를 인원과 금액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장학금은 가진 사람이 어려운 학생에게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실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이사장은 “어려워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며 “제가 같은 환경에 놓였다면 그 학생들처럼 공부하고 주변 친구까지 돌볼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매년 장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은 스스로 얻어낸 당당한 결실”이라며 “학생들에게 힘을 보탤 기회를 얻은 장학회가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철학의 뿌리에는 선친 고 이기학 회장이 있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 끝에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와코물산을 창업했다. 이 회장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부터 고향 학생의 학비를 대는 등 교육 지원을 이어왔다. “어머니께서 ‘집에는 봉급도 가져오지 않으면서 고향에는 장학금을 보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누군가 도와달라고 하면 할 수 있는 만큼 도우셨던 것 같아요.” 

다만 개인이 그때그때 건네는 도움은 시간이 지나면 기록과 체계를 남기기 어려웠다. 이 이사장은 선친에게 “흩어진 선의를 지속 가능한 제도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2005년 선친의 아호를 딴 학봉장학회가 설립됐다. 이 회장은 2012년 세상을 떠나며 국내 전 재산 29억 3000만원을 장학회에 유증했다.

그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지원 대상도 조금씩 넓혀왔다. 도움의 대상을 꾸준히 찾아 나서면서 학봉장학회의 지원 대상은 광주·전남 지역 학생에서 비인가 대안학교 학생, 장애인 야학생, 다문화가정 대학생 등으로 넓어졌다. 기존 제도의 손길이 충분히 닿지 않는 ‘교육의 사각지대’를 살피는 데 무게를 뒀다. 이 이사장은 장학생 신청서의 자유기재란을 직접 읽고, 특별히 안타까운 사연에는 장학회 사업과 별도로 지원하기도 한다. 최근에도 뇌종양 진단을 받고도 학업을 이어가는 서울대 대학원생에게 사재를 보탰다.

장학생의 이후 진학이나 직업을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는 성장은 이름난 학교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데 가깝다. “장학생들이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편지를 보내곤 해요.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습니다. 남을 돕는 데 꼭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친구를 돕고, 곤란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지금도 할 수 있잖아요.”

학봉장학회는 장학금 지급에 머물지 않고 사회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학술·교류 사업으로 활동 폭을 넓혀왔다. 2015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과 함께 제정한 ‘학봉상’은 청년실업과 세대갈등, 저출산, 교육 불평등, 인구와 젠더 등 해마다 다른 사회문제를 다뤘다. 이 이사장은 “여러 문제가 서로 얽혀 있는 만큼 지혜를 모아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특히 한일 교류에 대한 관심은 이 이사장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다. 1958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공립학교를 다니면서도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한국에서 살아본 적도, 한국어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지만 대학만큼은 한국에서 다니기로 했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면 우리말을 배우고 한국 친구를 사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며 1976년 한국에 와 1년간 한국어를 배운 뒤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 대우에서 약 20년간 근무한 뒤 2001년부터 선친이 세운 와코물산 대표를 맡아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양국을 오가며 살아온 경험은 한국과 일본이 함께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일관계 보도를 시상해 온 학봉상 언론보도 부문은 현재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학봉 한일저널리즘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소멸과 자연재해, 젠더 등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를 함께 연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대학원생이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장학과 사회공헌에 적지 않은 재산을 내놓아 온 이 이사장의 일상은 오히려 검소하다. 1990년대 대우 재직 당시 만든 견본 셔츠와 어머니가 사준 코트를 30년째 입고, 20년 된 경차를 이용한다. 필요 이상의 소비를 삼가면서도 그는 “그 안에 남은 경험과 사람을 오래 누리는 삶을 더 귀하게 여긴다”며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아주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그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한일 시민들이 참여하는 월례 스터디포럼에 참석하고, 이튿날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선친이 건넨 도움을 장학회라는 제도로 이어간 그는 지금 또 다른 사람들과 다음 세대가 이어갈 길을 찾고 있다. 
이정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