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호 2026년 7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끝을 알 수 없는 구보
이정구(전기61) 전 대우건설 사장
끝을 알 수 없는 구보

이정구(전기61)
전 대우건설 사장
1963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7월. 지난 한 학기 동안 교내에서 이론 및 실습 중심의 군사학 수업을 받은 3백여 명의 서울대 학군단(101학군단) 3기 생도들은 실질적인 기본 전투기술을 포함한 4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수색에 있던 30예비사단에 입영을 했습니다.
입소 당일, 입고 온 사복과 소지품을 사물함에 넣어 보관창고에 맡기고 지급 받은 군복으로 바꿔 입었으나 군복은 몸에 익지 않았으며 군화는 발에 깁스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입소식이 시작되는 사단 연병장으로 향하는 생도들은 비록 군복은 착용했으나 얼굴 표정과 행동은 민간인 냄새가 여전하였습니다. 오와 열은 수시로 무너지며 군인의 절도 있는 자세나 동작은 보이지 않고 마치 야외 공연장에 입장하는 아직도 철없는 학생의 티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지요. 넓은 연병장은 생도들을 행사 대형으로 정렬시키려는 훈련교관과 기간요원의 호루라기 소리와 구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가까스로 입소식을 마친 뒤 막사로 돌아오는 생도들의 어깨는 무언의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입소식 준비 과정에서 맞닥뜨린 훈련 교관과 기간요원들의 강한 기세와 압박으로 보아 앞으로 4주간의 하계훈련이 만만치 않을 것이 확실해 보였으며 선배들이 겁주며 알려주던 “반드시 한번은 겪을 민간인 물빼기 기합”이 어느 때 어떤 형태로 들이닥칠지 요량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간인 물빼기’란 통과의례는 오래 기다려 주지 않고 바로 입소식 다음 날 오후에 찾아왔습니다. “소화를 돕기 위해 간단한 구보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연병장 트랙을 도는 구보가 시작되었습니다. 탄띠, 탄입대, 수통, M1소총에 헬멧 등 15kg의 단독군장이지만 어제까지 남방셔츠 차림이었던 생도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짐이었습니다.
기세 좋게 출발한 구대의 선두를 따라 본대 그리고 후미까지 구보 구령과 군가를 번갈아 가며 트랙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러 명의 훈련 조교가 요소요소에 따라붙어 점차로 일사불란한 구보 대열 형태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단 연병장은 작열하는 태양열로 이미 달구어진 상태이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내리쬐는 복사열에 노출된 피부가 붉게 익어가는데, 쏟아지는 땀방울과 머리 위에서 제멋대로 회전하는 철모, 만만치 않은 무게의 M1소총이 점점 생도들의 인내를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트랙을 한 바퀴 돌았는데도 훈련 교관의 구보 구령은 계속되어 생도들은 비로소 이 구보가 한 바퀴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더욱 불길한 것은 구보를 시작하기 전에 몇 바퀴를 돌 것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소위 체력 이전에 심리적 고문인 ‘끝을 알 수 없는 구보’가 시작된 것입니다. 벌써 서너 명의 탈락자가 생겼습니다. 세바퀴가 끝나갈 무렵에는 구보 대열이 이전 같지 않게 힘이 빠진 느낌이 드는 게 양손으로 총목과 총열 덮개를 잡고 가슴 앞쪽에 밀착되어야 할 소총의 총신이 지면에 평행하게 쳐진 게 눈에 띄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5)바퀴째를 시작하면서 구보 대열에 약간의 생기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섯바퀴에 인간의 ‘심리적 기준수(어림수)’의 하나인 ‘5’가 있어 이제 이 고비만 견디면 분명히 끝이 올 것이라는 임의의 보상 심리가 은연중에 발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도들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 바퀴 구보가 끝났는데도 교관의 구령이 계속되자, 순식간에 다수의 탈락자가 쏟아졌습니다. 기대심리의 붕괴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전히 생도들에게 구령과 군가를 더 크게 부르라는 교관의 호통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구령과 군가도 입만 딸싹거리는 형편이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힘겨운 구보가 계속되면서 생도들의 마음 한구석에 몰인정한 훈련 교관에 대한 반항심과 저주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심리적 탈진을 부분적으로나마 붙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몰인정한 교관이라 할지라도 이런 혹독한 날씨에 열(10)바퀴 이상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마지막 한 바퀴에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냈습니다.
열바퀴째 트랙 종점에 도착한 선두는 마치 확정된 목표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지를 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데, 기대를 배신하듯 폭발한 교관의 호통과 강행 명령은 생도들의 남은 정신 줄을 통째로 끊어버렸습니다. 다섯 바퀴째 때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대오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탈락자들에게 별도 기합을 주기 위해 구보 대열에서 떨어져 있던 조교들까지 합세하여 선두를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두 바퀴 정도 더 돌고 끝을 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목표 미정 구보’는 종종 사용되는 극단적 기합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민간 물’을 빨리 빼내 주어진 4주간의 짧은 훈련이 충실히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자, 앞으로 마주할 혹독한 군인으로서의 삶에 적응시키려는 교관들의 치밀한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구보가 끝나고 연병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생도들의 온몸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원망과 고통 대신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얽혀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