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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호 2026년 7월] 문화 나의 취미

“예쁘니까 그냥 지나치지 못했죠”…스크랩북 담은 44년의 가을

반세기 이어온 단풍잎 수집 취미, 서울·여주서 두 차례 전시 열어
“예쁘니까 그냥 지나치지 못했죠”…스크랩북 담은 44년의 가을
 
김춘석(사회69) 전 여주시장

김춘석 동문이 여주 세종도서관에 전시된 단풍 표본을 소개하고 있다.
 
반세기 이어온 단풍잎 수집 취미
서울·여주서 두 차례 전시 열어

“이게 44년 됐어요. 1982년에 딴 겁니다.”

6월 30일 여주 세종도서관에서 만난 김춘석(사회69·사진) 전 여주시장이 오래된 단풍잎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학 시절 책갈피에 넣어 둔 은단풍나무 잎이었다. “그해 가을 단풍은 불타는 듯 붉었어요.”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잎을 따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40여 년 동안 이어진 취미는 그렇게 시작됐다.

단풍잎 수집은 손이 많이 간다. 산에 갈 때는 반드시 커버가 있는 책을 챙긴다. 수분을 잘 빨아들이는 종이 사이에 잎을 넣고, 두꺼워진 책을 커버로 다시 눌러 압착한 채 가져오기 위해서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신문지를 깔고 잎을 한 장씩 펼친 뒤 다시 덮고, 무거운 물건으로 누른다. 신문지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갈아 주는 과정을 네댓 번 반복해야 잎 속 습기가 빠지고 색과 형태가 살아난다. “손이 많이 가도 하여튼 예쁘니까, 예쁘니까 정성껏 수집한 거죠.”

그렇게 모은 단풍잎은 스크랩북 23권에 이른다. 한 권에 100~150장가량 들어 있으니, 수천 장의 가을이 책장 안에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그에게 단풍잎은 단순한 낙엽이 아니다. 산길에서 만난 계절의 표정이고, 그날의 마음까지 함께 눌러 둔 기억이다. 몇십 년이 지나 다시 꺼내 보면 어느 산을 올랐는지, 어떤 빛이었는지, 그때의 장면이 되살아난다.

김 동문은 단풍을 따러 가는 일을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러 가는 일”이라고 했다. 가지를 살짝 잡아당기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붉은 치마저고리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여쁜 아가씨들처럼 보인다”고 한다. 수백 장의 잎 가운데 가장 고운 서너 장을 고르는 일은 ‘최고 미인’을 뽑는 일과도 같다. 기준은 분명하다. 선명하게 붉고, 가장자리가 뜯어지지 않았으며, 형태가 온전해야 한다.

하지만 오래 좋아한 취미는 사람의 눈도 바꿔 놓는다. “예전에는 무조건 새빨갛고 형태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뜯어지고 색이 달라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더라고요.” 이제 그는 완벽함보다 각자가 견뎌 온 시간의 무늬를 더 눈여겨보게 됐다. “나이가 드니 마음도 바뀌는 것”이라며 그는 웃었다.

단풍을 오래 바라본 사람에게는 나름의 시선이 생긴다. 김 동문은 단풍에서 인생의 시간표를 본다. 멀리서 보면 온 산이 불타듯 붉어 가장 찬란한 순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 절정을 지나 검붉게 변하기 시작한 잎이 대부분이다. “정상에 딱 올라간 순간은 오래가지 않아요. 그다음은 내려갈 일밖에 없지요. 오히려 8부 능선, 9부 능선쯤이 제일 고운 때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취미는 그에게 아름다움을 고르는 눈뿐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눈도 길러 줬다.

그가 꼽는 국내 최고의 단풍 명소는 설악산이다. 잎 하나하나의 빛과 선명함이 뛰어나다는 이유에서다. 지역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어 눈길을 끄는 장소로 지리산 피아골을 첫손에 꼽았다. 피아골은 열두 번가량 찾았고, 오대산 선재길과 치악산 상원사 계곡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는 단풍을 보러 갈 때 주로 계곡을 찾는다. 물가에 있는 단풍이 더 곱게 물들고, 적당한 수분과 계단식으로 내려가는 기온이 단풍잎을 선명하게 익힌다는 경험 때문이다.

해마다 같은 곳을 다시 찾는 것도 이 취미의 즐거움이다. 익숙한 장소를 여러 해 지켜보면 단풍의 변화를 더 잘 알 수 있다. 지난해에는 별로였던 곳이 올해는 빼어나게 아름답고, 한때 최고였던 곳이 빛을 잃기도 한다. 같은 산, 같은 계곡이라도 해마다 단풍은 다르게 온다. “올해는 어떻게 물들었을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 그를 가을마다 다시 산으로 향하게 한다.

단풍을 향한 열정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캐나다 메이플 로드를 19일간 홀로 여행했다. 단풍 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길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오랜 취미는 자연의 변화도 예민하게 느끼게 했다. 그는 최근 단풍의 색이 예전만 못하다고 말한다. 늦더위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잎이 서서히 물들 시간이 부족해 곧바로 검붉게 변하거나 얼룩이 생긴다. 예전 단풍과 최근 채집한 잎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는 더 선명하다. “손바닥보다 작은 단풍잎에서도 기후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40여 년간 모은 단풍잎은 전시로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혼자 간직하던 취미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운 잎들을 보며 그는 이 가을의 기록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어졌다. 스크랩북을 한 장씩 넘기며 전시에 걸 만한 잎을 고르는 데만 한 달 반이 걸렸다. 그에게 전시는 취미의 목적지가 아니라, 오래 좋아한 마음이 흘러넘쳐 마련된 자리였다.

김 동문은 자신의 단풍잎을 본 사람 중 한두 명만이라도 “나도 무엇이든 오래 모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에게 취미란 삶의 스트레스를 잊게 해 주는 몰입의 시간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생활의 활력소가 됩니다. 그것이 자기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죠.” 책갈피 속 단풍 한 장은 40여 년 동안 한 사람의 가을을 따라왔다. 붉게 물든 잎마다 산길의 기억이 있고, 세월의 흔적이 있고, 자연을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삶의 비유가 담겨 있었다. 이정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