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호 2026년 6월] 문화 맛집을 찾아서
법률가에서 전통주 제조자로…“술의 세계는 무궁무진”
전통 누룩·옹기 숙성으로 빚은 술, 세계 주류 품평회 최고상 수상
법률가에서 전통주 제조자로…“술의 세계는 무궁무진”

정회철(사법81) 전통주조 예술 대표
전통 누룩·옹기 숙성으로 빚은 술
세계 주류 품평회 최고상 수상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 문학의 정취가 남은 조용한 마을 한편에 쌀과 누룩이 익어가는 공간이 있다. 전통주조 ‘예술’의 문을 열면 발효의 향이 다가온다. 구수하면서도 은근한 누룩 향과 막 빚은 술에서 올라오는 산미, 오래 숙성된 증류주의 깊은 향이 한 공간 안에 겹쳐진다.
5월 26일 만난 정회철(사법81·사진) 전통주조 예술 대표는 변호사와 헌법 강사, 교수를 거쳐 전통주 제조자의 길에 들어섰다. 취미로 시작한 술 빚기는 5년의 시간과 3년 가까운 배움을 거쳐 2012년 창업으로 이어졌다. 정 동문은 이곳을 양조장이 아닌 ‘양온소’라 부른다. 고려시대 왕이 마시던 술을 빚던 관청 ‘양온서’에서 따온 말로, 우리 술의 오래된 이름과 정신을 되살리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예술에서는 탁주와 약주, 증류식 소주를 함께 만날 수 있다. 현재 제품은 탁주 4종, 약주 3종, 증류식 소주 1종이다. 처음 전통주를 접하는 사람에게는 탁주 ‘춘천 아리랑’이 무난하다. 찹쌀을 주로 사용해 빚어 부드럽고 편안하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이화주 ‘배꽃필무렵’은 물을 넣지 않고 쌀이 지닌 수분으로 빚어, 술이라기보다 농밀한 디저트처럼 느껴진다. 맑은 술 ‘동몽’은 탁주와는 또 다른 정갈한 맛을 전하고, 증류식 소주 ‘무작 53’은 예술의 철학과 기술이 응축된 대표작이다.
정 동문이 처음 술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쌀과 누룩을 넣은 작은 항아리에서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발효 과정에서 올라오는 탄산가스 소리였다. “항아리에 귀를 대보니 정말 끓는 소리가 났습니다. 신기하기도 했고, 그때부터 술 빚는 일이 재미있어졌죠.” 직접 빚은 술을 주변 사람들과 나눴더니, 누군가는 빈대떡까지 부쳐 왔다. 그는 그때 “우리 술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를 처음 느꼈다고 했다.
예술의 술맛을 결정하는 핵심은 정 대표가 “술의 근본”이라 말하는 누룩이다. 쌀을 알코올로 바꾸는 발효 미생물이 누룩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양조장이 시판 누룩이나 배양균을 활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은 직접 띄운 전통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그는 “누룩을 바깥에 의존하면 내 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7~8년 가까운 시행착오 끝에 안정화한 누룩은 인공감미료 없이 예술만의 맛을 만들었다. 일반 막걸리가 며칠 만에 완성되는 것과 달리, 예술의 술은 2~3개월가량 긴 발효 시간을 거친다.
“술맛은 원료에서 나와야 합니다. 인공적으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쌀 자체에서 나오는 맛, 자연의 맛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술에서 느껴지는 단맛은 과하게 치고 올라오지 않는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달잖아요. 그런 맛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맛이죠.” 그래서인지 예술의 술은 자극적인 맛보다 은근한 맛을 오래 남긴다.
술과 음식의 궁합도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꼭 전통주라고 해서 전통 음식하고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 같은 음식과도 잘 어울릴 때가 많아요.”
예술을 대표하는 술은 단연 ‘무작 53’이다. 하늘나라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신선을 뜻하는 ‘적선’에서 유래한 조선시대 문헌 속 적선소주를 재현한 술이다. ‘무작’은 불경의 ‘수연무작’에서 따온 말이다. 정 대표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하늘이 만든 술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무작 53은 지난해 세계적 증류주 품평회인 Spirits Selection by CMB에서 그랑골드 메달을 받으며 세계 무대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정 대표는 “한국 전통 소주의 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며 “한국 전통 소주 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무작 53을 마셔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 과정도 남다르다. 무작 53은 누룩으로 빚은 맑은 청주를 상압 방식으로 증류한 뒤, 흙으로 빚은 옹기에서 5년 이상 숙성한다. 정 대표는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나무 향이 배지만, 우리는 옹기에서 숙성한다”며 “흙이 가진 미네랄 성분이 술과 만나 향을 만든다”고 했다. 유리병 제품은 5년, 옹기 제품은 10년 숙성으로 차이를 두며, 옹기 제품은 병 자체가 숙성 용기 역할을 한다.
무작 53의 향은 강렬하게 치고 들어오기보다 은은하게 번진다. 과일 향, 견과류 향, 흙과 바람이 섞인 듯한 신선한 향이 천천히 올라온다. 향을 맡고, 입 안에 머금고, 목을 넘긴 뒤 남는 여운까지 즐길 수 있다. 정 대표는 “중국 술은 향이 너무 세고, 일본 술은 향이 거의 없다고 본다면 무작은 은은한 향이 오래 간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수상에도 정 대표의 고민은 여전하다. 품질은 인정받았지만 대중이 쉽게 접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도수와 가격 부담을 낮춘 새 증류주도 준비 중이다.
정 대표는 한국 전통주가 더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마셔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한국 사람들이 한국 술을 잘 모릅니다. 고급 술이라고 하면 위스키나 브랜디를 떠올리죠. 하지만 우리에게도 훌륭한 전통 소주가 있습니다.”
동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이와 맞닿아 있다. “한국 술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한국 전통주에 대해서도 한 시간쯤 이야기할 수 있는 술자리가 만들어져야죠.”이정윤 기자

세계적 증류주 품평회 최고상을 수상한 ‘무작 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