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호 2026년 5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9시 반의 당구’를 기억하며
“김윤식 교수님의 첫 강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내 어머니 박완서의 단편소설을 언급해 귀가 번쩍 뜨였다”
‘9시 반의 당구’를 기억하며

호원숙(국어교육72)
작가
“김윤식 교수님의 첫 강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내 어머니 박완서의 단편소설을 언급해 귀가 번쩍 뜨였다”
몇몇 72학번 동기들은 일주일에 한 번 동숭동 학림다방에 모였다. 그 당시 노벨상을 탔던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9시 반의 당구’를 처음 읽기로 하면서 모임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고 정말 9시 반에 만나게 되었다. 교양과정부 독일어반 ‘인문학부 LA’ 친구들. 나는 그 LA라는 말을 무조건 좋아했다. 그때 책을 같이 읽던 친구들의 모임은 우리에게 절실했다. 1972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는 자주 휴교했고 수업은 중단되었다. 학기 초에 교수님의 얼굴을 보는 정도였고 휴교하는 날수가 수업일보다 더 많은 날들이 4년 내내 이어졌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대 탓을 하기엔 정말 죄송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른 시간에 만나 같이 읽었던 책들은 지금도 중요하다. 나는 지적인 수준이나 독서량이 그 서울대 친구들에 비해 늘 못 미쳤다. 연극반을 하던 친구는 안톤 체홉의 작품 ‘갈매기’의 연극 속 이름으로 니나라고 불리웠다. 보르헤르트의 ‘문 밖에서’를 공연한 독문과 친구는 어렵사리 독일로 유학을 가서 카프카의 연구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토론을 좋아했고 그 때 나왔던 국내의 신작 문학 계간지를 섭렵했다. 나는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소설을 좋아했다. 그 때 같이 읽었던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는 감동적이었고 책이 아름다웠다.
나는 1975년 관악캠퍼스로 간 첫 해 김윤식 교수님의 첫 강의를 들은 날을 잊지 못한다. 강의 도중 어머니의 단편소설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고 귀가 번쩍 뜨였다. 학생 중에 작가의 딸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하셨고 귀띔을 해줄 주변머리도 없었다, 교수님은 항상 먼 곳을 보고 강의를 했기에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1동에 있는 연구실로 줄줄 따라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김 교수님도 한 여학생이 연구실까지 따라오는 사건을 잊지 못하셨다.
그 인연으로 어머니의 첫 단편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일지사에서 내게 되었다. 여성동아 출신만으로는 문단에서 제대로 된 작가 대접을 못 받을 거라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 데뷔하자마자 좋은 단편소설을 써내셨고 그게 모여 첫 창작집이 된 것이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나는 그 9시 반의 당구 친구들을 매년 어머니의 추모 연극공연에서 만난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지금도 속이 시원하다. 생각하는 게 다르고 전공 분야도 달랐지만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퇴임을 한 후에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탐구하는 태도에서 겸손함을 배운다.
그 친구들은 나의 글을 좋아한다.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던 친구의 어머니는 이번에 나온 내 책(엄마 박완서의 옷장)을 읽고 재봉틀을 꺼내어 옷을 수선하셨다고 한다. 내가 처음 책을 낼 때부터 나의 글을 즐겨 읽어주신다고 했다.
벽돌책만 한 시집을 낸 시인(김정환)의 아내인 친구는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한다. 우리는 아내의 모습만 가려내어 시집을 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열심히 어머니의 문학을 갈무리한다. 나도 모르게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나에게 1인 연구소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나는 그런 비유를 좋아한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려는 리버럴 아츠의 자유로운 정신을 친구가 알아주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의 문학은 끝없이 샘솟는 샘물처럼 연구할 거리와 숙제를 내어 준다. 내가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서울대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2월 9일 어머니 박완서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이 열린 것은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