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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2026년 5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학문이 참여였고, 참여가 학문이었다 

이홍구 선생님을 보내며 
학문이 참여였고, 참여가 학문이었다 

유홍림(정치80) 서울대학교 총장 

이홍구 전 총리의 2017년 3월 총동창신문 인터뷰 당시 모습
 
이홍구 선생님을 보내며 

효당(曉堂) 이홍구 선생님께서는 한국 정치학의 철학적 기반을 닦으신 큰 학자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 정치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시기에 공직을 맡으셔서 이후 국가와 사회 발전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신 경세가이셨습니다.

1980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저에게는 40년 넘게 가르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스승이십니다. 선생님을 영면의 세계로 보내드리는 아픔과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나 학자로서 정치지도자로서 영원한 모범으로 기억될 선생님의 생애를 기리며, 남겨주신 큰 가르침을 숙연하게 되새기고 계승하는 것이 저희 후학들이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영결식에 함께하신 여러분과 학자이자 스승으로서의 이홍구 선생님을 회상하고자 합니다. 학자의 지혜와 스승의 품격을 갖추셨기에 선생님께서 공직에 임하신 동안 시대를 이끄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홍구 선생님께서는 1968년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사회보존과 정치발전”에서 제시하신 중용과 절제, 포용과 화합의 정치철학을 이후의 학문과 정치 참여에서 일관되게 유지하고 실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구축하신 정치철학의 근본 정신은 실천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은 가치와 규범을 토대로 현실 정치를 분석하고 처방을 모색하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천적이며 규범적인 정치학은 선생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선생님께서 정치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율적 의지로 하는 것”이며, 역사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와 인간, 그리고 정치에 대한 유연하고 폭넓은 식견이 선생님의 사상과 삶의 궤적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학문과 한국 정치발전을 위한 실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제가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했던 1980년대는 한국 정치의 격변기였습니다. 그 혼란의 시기에 선생님의 정치사상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정치사상 강의, 플라톤의 <국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거쳐 홉스, 로크, 루소, 헤겔과 마르크스의 근대정치사상에 이르는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은 정치사상 강의는 이후 저희들의 삶에 방향과 활력을 제공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존경하는 선생님의 영향으로 정치사상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는 이상의 추구를 통한 현실의 개조 작업이며, 정치사상은 정치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창조적 작업”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오늘날 정치학을 다시 정치 현실에 유의미한 학문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학자들이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중용과 포용의 덕을 몸소 실천하신 학자이자 스승이신 선생님께서는 군자와 신사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현실 참여의 책임을 사명감으로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폭과 깊이를 겸비한 철학과 이론을 구축하셨지만, 설득을 중시하는 지도자이셨습니다. 탁월한 균형감각, 어떤 지위에서도 항상 겸손함을 유지하는 품격을 보여주셨습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3년 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하시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다시 뵐 수 없다는 애통함을 금할 길 없지만,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큰 가르침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공적 책무의 무게를 감내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모아 거듭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