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호 2026년 5월] 문화 신간안내
보이지 않는 위계를 드러내는 공간의 언어
일상 공간서 계급욕망 흔적 찾아, 아파트는 주거 넘어 지위재 기능
보이지 않는 위계를 드러내는 공간의 언어

계급욕망의 유전자
서 현(건축82)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효형출판
일상 공간서 계급욕망 흔적 찾아
아파트는 주거 넘어 지위재 기능
인류가 정착과 농경을 시작하며 잉여를 만들었고, 그 잉여를 둘러싼 분배와 교환의 과정에서 계급과 도시가 탄생했다. 서 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 익숙한 문명사의 서두를 한 가지 질문으로 다시 묶는다. “자유는 어떻게 분배되어 왔는가.” 그리고 그 답을 ‘계급욕망’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서 교수는 “높은 자유도의 계급은 언제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욕망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라고 쓰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란 선택 가능성의 총량이며, 권력은 그것을 나누는 능력이다. 문제는 그 분배의 차이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진 계층은 자신을 드러내고, 그렇지 못한 계층은 이를 모방한다. 이때 욕망은 언어보다 먼저 시각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건축, 도시, 의복, 심지어 생활양식까지 모든 문화적 표식은 결국 계급을 드러내거나 숨기는 장치가 된다.
이 책의 미덕은 이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장면으로 설명하는 데 있다. 르네상스 건축의 얇은 장식적 표피, 콘크리트 위에 덧붙인 벽돌, 피아노 위 레이스 덮개, 그리고 오늘날 브랜드 아파트의 정문까지, 저자는 일상의 사물과 공간에서 계급욕망의 흔적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특히 ‘잔디밭 출입 금지’와 같은 사소한 규범조차 계급적 구분의 역사적 산물로 읽어내는 대목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분석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신념’이다. 저자는 프로테스탄티즘을 계급 구조를 흔든 결정적 계기로 본다.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를 제거한 이 신념은 위계 질서를 약화시키며 자유의 분배 방식을 바꿨다.
그러나 동시에 신념 역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화하며 또 다른 질서를 만들어낸다. 계급을 해체한 사상이 다시 새로운 위계를 낳는 역설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후반부에서 시선은 한국 사회로 옮겨온다. 아파트, 예식장, 장례식장, 대통령 상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제도와 공간이 사실은 계급의 언어로 구성돼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아파트가 주거를 넘어 ‘지위재’로 기능하는 현실에 대한 분석은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저자는 복잡한 역사와 문화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단순한 명제를 제시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확장해 왔지만, 그 자유의 차이는 곧 욕망의 차이를 낳았고, 그 욕망은 공간과 형식 속에 기록돼 왔다는 것. 결국 우리가 사는 도시는 그리고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의 흔적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다.
서 현 교수는 모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Tai Soo Kim Partners와 창조건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2019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부임했다. 건축 설계와 비평을 넘나들며 한국의 도시와 공간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월부터 건축학과동창회 회장도 맡고 있다.
김남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