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호 2026년 4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문명은 내부에서 먼저 무너진다
지성과 경험을 갖춘 이들이 선제적으로 선한 길 개척해야
문명은 내부에서 먼저 무너진다

전영기(정치80)
시사저널 편집위원
본지 논설위원
지성과 경험을 갖춘 이들이
선제적으로 선한 길 개척해야
“위대한 문명은 스스로 파괴하기 전에는 전복되지 않는다.”
미국 역사학자 윌 듀란트의 통찰이 새삼스럽다. 이 관점은 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논의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개별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의 관점에서 사안을 보는 방법론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
멜 깁슨 감독의 2006년 영화 <아포칼립토>가 서막에 듀란트의 명구를 등장시켜 위대한 역사학자의 존재를 대중화했다. 영화의 배경은 16세기 초 쇠퇴기에 접어든 마야 문명. 거대한 피라미드 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인신공양과 지배층의 부패는 이미 내부에서 시작된 마야 파멸의 징후였다.
내부가 곪아 터졌을 때 비로소 스페인 함선이라는 외부의 물리적 종말이 들이닥친다. 함대를 뒤로 하고 정복자들이 해변을 걸어 들어오는 ‘아포칼립토’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듯하다. ‘문명은 내부에서 먼저 무너진다.’
2026년 오늘, 세계는 다시 한번 문명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향해 “오늘 밤 한 문명(civilization) 전체가 사라져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4월7일)”이라고 발언했다. 그의 문명 파괴론은 국제적 비난과 함께 미국 안에 해임론까지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문명 소멸과 탄생의 조건’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트럼프라는 존재 자체가 기성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문명으로의 이행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탄이기도 하니까.
요즘 국제 정세는 20세기 초 두 차례 세계대전 직전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외부 상황 뿐만 아니다. 우리가 매일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 역시 거대한 소멸과 탄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변화가 한국의 문명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시킬 성숙의 과정일지, 내부 결속력을 상실한 채 좌표를 잃고 추락하는 전조일지는 훗날이 대답할 것이다. 분명한 건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은 부패와 분열 속에 제도와 시스템의 붕괴로 무너진다. 그런 가운데 인간은 고난을 돌파하며 성숙한다. ‘아포칼립토’의 주인공이 사투 끝에 가족을 지켜내듯, 격변기일수록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정교한 촉과 이를 견뎌낼 신체와 정신의 근력이 필요하다. 남은 자들이 새 문명을 세운다. 문명이 위기를 만났을 때, 전진의 계기로 삼느냐 자멸하느냐는 내부의 총체적 역량에 달렸다.
대부분의 서울대 동문들에겐 세상의 미래를 안내해야 한다는 일말의 부채의식이 잠재해 있다. 지성과 경험을 갖춘 이들이 문명 전환을 선제적으로 감각해 선한 길을 개척해야 할 때다. 비상한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고난을 이겨내면 성숙과 구원이 올 것이다. 미증유의 전환기,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좁은 해협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