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호 2026년 4월] 오피니언 논단
견디는 나라 설계하는 나라
견디는 나라 설계하는 나라

김세진(정치00)
법무법인 세종 통상산업정책센터장
지난해 초여름, 필자는 책 '조건부 자유무역 시대'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로부터 거의 1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세계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미국의 IEEPA 기반 상호관세는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고,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무역법 301조를 꺼내 들었다. WTO 제14차 각료회의는 기존 합의조차 지켜내지 못한 채 산회했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됐고, 중국은 제15차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와 안보의 통합을 공식 문서로 선언했다. 일본에서는 다카이치 정부가 출범해 전략국가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강대국들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한국에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 관세 협상 끝에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것을 단순한 협상 결과물로만 읽으면 절반밖에 못 보는 것이다. 무역 접근권이 투자 약속을 조건으로 주어지는 시대. 관세 협상이 곧 산업 재배치 협상이 되는 시대.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은 그 시대의 첫 번째 큰 기록이 됐다. 동시에 이것은 시작점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모든 협상에서 한국이 무엇을 어떻게 선점하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선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주목하는 것은 이 개별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관통하는 구조의 변화다. 책을 쓸 때 나는 세 가지를 예측했다. 통상 아젠다가 산업 아젠다로 전환될 것. 다자체제가 양자·블록 체제로 이동할 것. 협정 텍스트보다 각국의 규제 체계가 더 중요한 규범이 될 것. 1년이 지난 지금, 이 세 예측은 더 선명해지고 있다. 다만 그 위에 덧붙여야 할 것이 하나 생겼다.
통상은 이제 산업 아젠다를 넘어 ‘안보화된 산업 아젠다’가 됐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압박에 응해 자국 내 중국계 반도체 기업(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직접 장악했지만, 정작 미중이 뒤에서 합의하는 바람에 중국의 보복과 국제적 비판을 혼자 떠안은 채 남겨졌다. 일본은 대만 유사시 발언 한마디에 미국의 외면을 경험했다.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먼저 희생한 나라가 오히려 홀로 남겨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출통제와 FDI 심사, 공급망 규제가 기업의 일상적 거래 환경을 이루고, 통상 전문가들이 읽어야 할 규범이 WTO 협정문이 아니라 ITAR·EAR·CFIUS 심사 실무가 된 지도 꽤 됐다. 안보와 통상과 산업은 이제 하나의 범주로 합쳐지고 있다.
더 본질적인 변화가 있다. 나는 책에서 미·중 갈등을 이 시대의 구조적 동력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미·중 갈등보다 미·중의 ‘공모’다. 경쟁하는 두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묵시적으로 협조하고, 그 협조가 중소국의 전략 공간을 구조적으로 좁히는 구도 말이다. 강대국들의 경쟁과 공모는 이제 더 이상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세계는 분쟁을 종식하는 방향이 아니라, 분쟁을 관리하는 질서로 이행 중이다. 그 관리 질서 안에서 강대국들은 때로 중소국을 압박하는 구조를 공유한다.
이 구도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독특하다. 필자는 WTO 협상장의 분위기에서 처음 이것을 느꼈다. WTO에서 산업국가의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낼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정도였다. 전통적 강대국들을 포함한 유럽 각국은 EU로 묶여 과소대표되지만, 27개국이 합의해야 하므로 기민한 대응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법치 없이는 다양성을 통치할 수 없는 EU의 체질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와 잘 맞지 않는다. 한국은 이 지점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낼 충분한 역량을 지닌 몇 안 되는 산업국가다.
이란 전쟁은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지난 2~3년 사이 한국의 대표 전략산업이자 첨단산업으로 자리 잡은 반도체·바이오·2차전지·로봇·조선·방산·원자력 등이 세계 공급망의 결절점을 이루고 있다. 헬륨 공급의 64.7%를 카타르에 의존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세계 HBM 공급의 80%가 흔들린다. 호르무즈가 막히자 원유 운임이 일주일 만에 44% 폭등하고 LNG 현물 가격이 치솟았다. 세계 원유 수입의 60~75%를 호르무즈에 의존하는 한국은 최대 피해국이지만, 동시에 전 세계 LNG선의 84%를 건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이 전략적으로 ‘취약’하다는 것과 ‘불가결’하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위기와 기회가 같은 곳에서 나온다.
물론 이 ‘불가결함’이 자동으로 전략 공간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강점이 협상력으로 전환되려면 그것을 의식적으로 설계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대미 투자 약속을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미국 내 생산 거점과 기술 협력의 발판으로 전환하는 것. 방산의 유럽 진출 앞에 놓인 장벽이 기술이 아니라 규제 구조임을 인식하고 그 언어를 익히는 것. 중국의 흑연 수출허가 지연이 행정 착오가 아니라 협상 레버리지임을 전제로 공급망을 재설계하는 것.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모두 같은 질문을 향한다. 한국은 이 변화를 수동적으로 견디는가, 아니면 능동적으로 설계하는가.
변화의 시기에는 일등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일등이 된다. 산업 지형이 재편되고, 공급망이 재구성되며, 규범의 중심이 이동하는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다. 우리는 진실로 엄중한 시기를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