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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호 2026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나는 도구, 잘 쓰임 받을 수 있게 잘 듣겠습니다”

라오스·피지·필리핀 돌며 8년 근무 고령화 인구 감소 지역 대안 만들려 평창으로
“나는 도구, 잘 쓰임 받을 수 있게 잘 듣겠습니다”

장기려 의도상 받은 박건희(의학96) 평창군 보건의료원장
 
라오스·피지·필리핀 돌며 8년 근무
고령화 인구 감소 지역 대안 만들려 평창으로
 
꾸준히 관리받은 어르신 무릎 못 구부리다 스쿼트까지 
“평창을 돌봄 공동체 모델로 만들고 싶다”
 
국립의대 정원 50% 지역서 충원 바람직
지역에선 의료인 찾기 어려워 ‘종합전문의’ 있어야  
 
강원도 평창군. 서울의 2.4배에 달하는 넓은 땅에 4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인구의 37%가 노인이고, 소아과도 산부인과도 야간 응급 대응도 충분하지 않다. 지역 의료 붕괴가 더 이상 경고가 아닌 현실이 된 이곳에서, 모교 의대 출신의 한 동문이 만 3년째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3월 3일 강원도 평창군 보건의료원에서 박건희(의학96·사진) 원장을 만났다.

박 원장은 서울대 의대에서 예방의학 전문의 과정을 밟고,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정책관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약 8년간 라오스·필리핀·피지의 의료 낙후 지역을 누볐다. 귀국 후에는 안산시 보건소장과 경기도청 감염병관리지원단장을 역임하며 코로나19 대응을 이끌었고, 3년 전 스스로 평창을 택했다.

-전공 선택부터 남다른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처음부터 이 길을 생각하셨나요?
“처음 의대에 들어왔을 때는 허준 같은 명의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예과 시절 총연극회 활동을 하며 선후배·동기들과 여러 책을 읽고 논의하다 보니, 병을 악화시키거나 제대로 치료받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반성도 됩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저를 예방의학과 보건 정책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WHO에서 8년은 어떤 시간이었습니까?
“라오스에서는 아이를 낳다 목숨을 잃는 산모, 폐렴과 설사로 세상을 떠나는 어린이들이 있는 현장에서 모자 보건 사업을 했습니다. 피지는 태평양 21개 섬나라의 허브인데, 인구 500명 작은 섬에 배로 몇 시간씩 들어가야 하는 오지도 있어요. 의대도 간호대도 없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피지에서의 시간이 개인적으로도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젊었을 때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회심했어요. 지금은 새벽 기도가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귀국 후 평창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WHO에서 오래 자문 역할을 하다 보니, 직접 현장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대응을 마치고 나서는 제 본래 전공인 지역 의료로 돌아오고 싶었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대안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평창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과제의 최전선입니다.”

지난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는 박 원장에게 ‘제22회 장기려 의도상’을 수여했다. 박애정신을 실천하는 의료인에게 주어지는 이 상은 그의 삶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대변한다. 그는 수상금 500만원을 평창인재육성장학재단에 환원했다. 

-수상 소감을 들려주십시오.
“수상 소식을 듣고 장기려 박사님의 전기를 다시 펼쳤습니다. 평생을 낮은 곳에서 헌신하신 그분의 삶 앞에 제가 너무 작게 느껴졌어요. 보상이 아닌 격려로 받아들이고, 더 겸손하게 제 자리를 지키자고 다짐했습니다.”

-삶의 철학이나 좌우명이 있다면.
“좌우명은 ‘나는 도구이다. 잘 쓰임 받을 수 있게 잘 듣자’입니다. 제가 주역이 되어 무언가를 이루려 하기보다,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쓰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경청이라고 믿습니다. 의사가 된 이후 늘 스스로에게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되물어 왔는데, 그 물음을 놓지 않는 것이 제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평창군 보건의료원은 전국 262개 보건소 중 단 16개뿐인 ‘보건의료원’ 지정 기관으로, 응급실과 입원실을 갖추고 의사 14명이 근무한다. 하루 평균 250~300명의 환자가 찾는 이곳에서 박 원장이 공들인 사업 중 하나는 11년째 이어온 ‘노쇠 예방 관리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11월, 이 프로그램의 성과를 분석한 연구가 미국의학회지 ‘자마 네트워크(JAMA Network)’에 게재되며 주목을 받았다. 참여 노인 119명을 5년 6개월간 추적한 결과, 비참여 노인 대비 1인당 877만원의 의료비를 절감했고, 1인당 투입 비용 100만원 대비 약 9배의 효과를 거뒀다.

-프로그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고령화 사회의 핵심은 운동과 영양입니다. 어르신들이 혼자 흰밥에 김치만 드시는 경우가 많아요. 근력을 유지하려면 단백질 섭취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단백질 보충 음료를 하루 한 팩씩 드시고 주 2회 근력 운동을 하셨더니 근력도, 삶의 질도 달라졌어요. 수술한 무릎이 고장 날까 봐 무릎도 못 구부리던 분이 나중엔 스쿼트를 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약을 줄이는 것도 가능합니까?
“고혈압, 당뇨, 관절 통증, 이 세 가지 주요 질환을 약 최소화, 운동과 영양 중심으로 관리하는 것이 저희 목표입니다. 만성 질환이 없는 어르신은 연간 의료비가 50만원 수준이지만, 합병증이 생기면 2000만원까지 치솟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현재 국내 노인의 10%에만 적용해도 진료비 9조원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약보다 먼저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지역 의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의료진 확보는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 중 상당수가 헤드헌팅입니다. 경제적 보상만큼 중요한 것이 ‘이곳에서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은퇴하신 선생님들 중에서도 지역에서 보람 있게 일하고 싶으신 분들이 많은데, 정보와 연착륙 체계가 부족합니다. 75세까지는 충분히 왕성하게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상급 병원이 지역 의료기관과 연계해 그 창구 역할을 맡아줬으면 합니다. 실제로 저희 의료원에도 대학병원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세요. 인생에서 3년에서 5년, 그런 순환이 가능한 구조만 만들어진다면 인력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역의사제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비율을 몇 퍼센트 늘려 몇 년 묶어두겠다는 양적 접근보다, 어떤 의사를 길러낼 것이냐가 핵심입니다. 저는 지역 의사를 두 유형으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권역 상급 병원에서 심장·뇌·암 등 필수 중증 질환을 서울 빅5 수준으로 다루는 ‘세부 전문의’, 또 하나는 평창이나 정선 같은 오지에서 소아과·내과·외과·응급 처치를 아우르는 ‘종합 전문의’입니다. 지금, 이 종합 전문의에 대한 논의가 너무 부족합니다.”

-지역의사제로 뽑힌 학생들이 ‘2등 의사’로 여겨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는 국립 의대 정원의 50% 이상을 지역 의사 트랙으로 하는 방안을 지지합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자긍심을 갖듯, 지역 의사도 그런 자긍심으로 길러져야 합니다. 사립대를 포함한 전체 정원 중 10%만 지역 의사로 뽑으면, 90%가 주류이고 10%는 비주류가 되는 구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지역 주민들도 ‘우리 지역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라는 확신이 있어야 그 의사를 찾습니다. 그 신뢰를 만드는 것이 교육 과정의 핵심 과제입니다.”

-내년 신설되는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1조 1000억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큰 기회입니다.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일일이 다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광역 지자체가 실질적인 권한과 책무를 갖고 이 예산을 지역 실정에 맞게 운용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현립(県立) 의대가 그 지역 의료 인력을 책임지는 구조입니다. 우리도 도에 있는 국립 의대를 광역 지자체가 적극 지원하고, 그 졸업생들이 도내에서 일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실패에서 배우고 성공 사례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모교 후배 의학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인생은 짧고 우리는 우주의 작은 점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는 누군가에게 거대한 우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셨으면 합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 3년에서 5년 만이라도 지역에서 일해보시길 권합니다. 그 경험이 의사로서의 삶을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의료가 기술로만 존재하지 않고, 지역 사회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창이 그런 돌봄 공동체의 모델이 되고, 저 또한 그 안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는 일원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박건희 원장은 주말 부부로, 집은 경기도 안산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 인근이다. 교사인 부인과 사이에 대학생 형제가 있다. 취미는 산책과 수영. 
김남주 기자 

박 동문은 2009년 보건학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라오스에서 3년간 일했다. 당시 활동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