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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호 2026년 3월] 오피니언 재학생의 소리

서울대에서 배운 가장 느린 성장

서울대에서 배운 가장 느린 성장


구현준(간호20)
유기동물 봉사 동아리
 ‘꼬리’ 회장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춘 2020년, 이른바 ‘코로나 학번’으로 대학에 들어왔다. 캠퍼스 대신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찾은 곳이 보호소였다. 입학  후 꾸준히 봉사를 이어갔다. 

그해 겨울,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일상은 그대로였지만 안쪽의 균형이 흔들렸다.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모를 때마다 주말이면 일산 대화역 보호소로 향했다. 2시간 남짓, 대부분은 배변과 오물을 치우는 일이다. 남는 시간에 산책을 하고, 겁 많은 아이들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그 시간이 생활의 리듬을 다시 만들었고 도움이 됐다.

보호소에 반달이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성인 남성에게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어, 다가가면 도망가고 멀리서 짖기만 했다. 친해지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 년쯤 지나 어느 날, 반달이 발끝에 코를 대고 앉았다. 매주 얼굴을 비춘 결과였다. 반복되는 시간은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변화를 만든다. 보호소의 시간은 단순하지 않다. 아파서, 늙어서, 혹은 갑자기 아이들이 떠난다. 소식이 올라오는 날이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한동안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그래도 단톡방에는 사진이 올라온다. 함께 있던 장면들. 그 기록을 보며 함께한 시간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멈추지도 않게 된다.

몇 년 전 무릎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동물병원에서 큰 강아지를 들다 벽에 부딪쳤고, 수술과 재활이 길어졌다. 현역 입대 계획은 바뀌었고 지금은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 사이에도 주말의 보호소는 빠지지 않았다. 방진복 박스와 목장갑, 탈취제는 방 한쪽을 차지했고 빨래에서는 털과 냄새가 남았다. 가족은 불편해하면서도 그대로 두었다. 그 배려 덕분에 가능했던 시간이다.

나는 간호학을 공부한다. 돌봄이 직업이 될 예정이다. 서울대에서 배운 건 경쟁의 속도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다. 동물과 사람은 다르지만, 희망이 없어 보여도 기다리고 믿는 일은 닮아 있다. 보호소에서의 시간은 그 태도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었다.

학교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평가절하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보호소에 가면 아이들이 먼저 다가온다. 경계하던 아이가 품에 기대고, 손에서 약을 먹는다. 그 장면은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인이다.

언젠가 유기동물을 입양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병원비, 노령기 돌봄, 이웃과의 갈등, 매일 반복되는 산책.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6년째 ‘꼬리’의 회장을 맡고 있다. 쉽지 않은 자리였지만 혼자였던 적은 없다. 함께한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는 이 시간을 다른 누군가가 이어갈 차례다. 속도를 재는 법은 배웠지만, 멈추지 않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느렸지만 다른 어떤 성과와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것이 서울대에서 배운 가장 느린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