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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호 2026년 3월] 오피니언 논단

일본 평화국가에서 전략국가로 

일본 평화국가에서 전략국가로 

남기정(외교82)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일본이 구상하는 새로운 공간은
한국에게도 선택 폭 넓혀
일본 변화 단순 우경화 해석 금물
 
‘전략국가’ 일본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2월 실시된 일본 중의원 총선은 이를 예고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선거 결과 확인된 것은 전후 일본을 떠받쳐 온 ‘평화국가’ 정체성의 약화와 그 자리를 대체한 ‘전략국가’ 정체성의 부상이었다. 총선에서 다카이치가 이끈 자민당·일본유신회 연립여당은 전후 일본 정치에서 보기 드문 압도적 의석을 확보했다. 이를 배경으로 출범한 다카이치 2차 내각은 경제·안보·외교를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통합하려는 흐름을 제도화한 사건이다. 헌법 개정, 국가안보전략 개정, 방위력 증강, 경제안보, 적극재정은 이제 개별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성을 구성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일본 유권자들은 정책보다 지도자를 선택했다. 질문은 단순했다. “누가 위기의 일본을 이끌 것인가.” 다카이치는 비세습·비주류·여성 정치인이라는 서사를 통해 장기 침체와 고물가, 트럼프 리스크, 중일 갈등이 겹친 일본 사회에서 ‘위기 돌파형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물 정치가 일본의 역할 변화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에너지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이 만든 질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국가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 중국의 부상과 국제질서의 다극화 속에서 일본은 스스로 전략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국가가 되려 한다. 다카이치 내각은 적극재정과 산업정책, 공급망 재편과 방위비 증액을 결합해 일본을 대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국가, 즉 전략국가로 끌어올리려 할 것이다.

이 변화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국가 노선이 어떻게 이동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 일본은 헌법 제9조 아래 군사 역할을 최소화하는 ‘평화국가’였다. 탈냉전 이후에는 국제 분쟁에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보통국가’, 즉 ‘수동적 안보국가’로 이동했다. 2015년 아베 내각의 안보법제는 일본을 동맹 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군사 역할을 수행하는 ‘능동적 안보국가’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 일본은 여전히 비대칭적 미일동맹 속에서 역할을 확대하는 데 머물렀다. 

다카이치 내각에서 안보 3문서 개정과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스스로 대전략을 설계하고 지역질서 형성을 주도하는 전략국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일동맹의 성격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동맹이 일본 안보의 절대적 기반이었던 구조에서 점차 공동 전략을 조율하는 보다 대칭적 관계로 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협상 공간을 확보하며 동아시아 질서 형성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할 것이다.

이 변화는 한일관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전략국가화는 경계의 대상이지만 곧바로 관계 악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본이 구상하는 새로운 전략 공간은 한국에게도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일본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제약과 기회를 얼마나 정교하게 읽어내느냐이다.

트럼프 리스크로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는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동시에 역사 화해의 필요 역시 커지고 있다. 과거사는 단순한 과거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불신과 비대칭을 재생산하는 구조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과거사는 전략국가화를 시도하는 일본에게 아킬레스건이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충분히 정리하지 않은 채 규범과 질서를 말하는 일본의 언어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일본이 전략국가로 전환하려 한다면 군사력과 자율성뿐 아니라 과거를 책임 있게 관리하는 규범적 역량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사 문제는 일본에게 부담이 아니라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일본의 변화에 맞추어 한국의 대일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역사 문제에서 원칙을 세우는 일과 안보·경제 협력을 관리하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정의를 목표로 삼되 현실의 조건을 계산하고 그 조건을 바꾸는 외교를 설계하는 ‘정의를 위한 현실주의’다. 그 연장선에서 한일 양국은 전략국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다카이치 2차 내각의 출범은 일본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응 역시 달라져야 한다. 일본의 변화를 단순한 우경화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위험과 제약, 그리고 협력의 가능성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한일관계의 미래는 일본의 힘 자체보다 그 힘이 어떤 규범 위에서 행사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