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호 2026년 3월] 뉴스 본회소식
수덕사에서 마음 씻고, 추사 고택서 문자의 향기 맡고
동문 50여 명과 예산 기행, 4월 2일 강릉 오죽헌 예정
수덕사에서 마음 씻고, 추사 고택서 문자의 향기 맡고

추사 김정희가 연경에서 씨앗을 들여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106호) 앞에서 동문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동문 50여 명과 예산 기행
4월 2일 강릉 오죽헌 예정
“여긴 괜히 소리가 커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선 한 동문의 말에, 주변에서 낮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이 이어졌다. 덕숭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대웅전 기둥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고, 낮게 드리운 처마 아래에서는 발걸음 소리마저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화려한 장엄도, 시선을 압도하는 장식도 없었지만 공간은 이미 충분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2월 12일, 11회를 맞은 본회 국토문화기행을 통해 동문 50여 명이 충남 예산 일대를 찾았다. 이번 기행은 수덕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 기념관·고택, 화순옹주 묘역을 차례로 둘러보는 일정으로 구성됐다. 종교와 학문, 왕실 여성사의 서로 다른 결을 따라가며, ‘공간에 남은 역사의 흔적’을 직접 걷고 느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문들은 비슷한 속도로 걷고, 같은 풍경 앞에서 멈춰 섰다.
전란을 비껴선 고려 산사의 건축
기행의 첫 목적지는 덕숭산 자락에 자리한 수덕사였다. 수덕사는 백제 무왕 2년(601년)에 혜현(惠現) 스님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산지가람(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이다. 평지 사찰이 주류였던 시기와 달리, 산으로 옮겨 지어지며 전란의 피해를 비교적 덜 입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국보 제49호 대웅전 앞에 이르자 모두가 고개를 들어 기둥과 지붕선을 바라봤다. 정면 3칸, 측면 4칸. 맞배지붕. 고려 건축 양식인 주심포 구조. 기둥 위에만 공포가 얹힌 단아한 구조다. 조선 후기 다포 양식과 달리, 복잡한 장식이 없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가지런히 쌓았고, 상단은 갑석으로 마감했다. 배흘림기둥은 과장 없이 담백했고, 장식을 최소화한 공포와 단정한 처마는 건물을 땅에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고려 후기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웅전은 화려함보다는 균형과 안정감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한 동문은 “화려하지 않은데도 눈을 떼기 힘들다”며 “오래 버티는 힘이 이런 건축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웅전 앞에 잠시 멈추자, 바람이 들어오는 길과 햇살이 스며드는 각도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설명 없이도 공간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김찬식(GLP 41기) 동문은 “수덕사에 들어가는 순간 선을 행한다고 하지 않느냐”며 “처음에는 그냥 답사라고 생각했는데, 일주문을 지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바뀌어버린 느낌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런 자리는 혼자서는 잘 오지 않게 되는데, 함께 와서 더 의미 있었다”고 덧붙였다.
수덕사 아래 자리한 수덕여관 앞에 이르자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뀌었다. 고즈넉한 사찰의 공기와 달리, 이곳에는 근대 예술사의 숨결이 겹겹이 스며 있었다. 본래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1944년 수덕사 주지로부터 그의 제자였던 이응노 화백이 사비로 매입해 ‘수덕여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설사의 설명을 따라가자 나혜석의 삶, 이응노의 예술 세계, 그리고 만공 스님의 인연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했다. 초가 지붕 아래 조용히 서 있는 이 작은 여관이 한국 근대 예술사의 한 장면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동문들은 “이 작은 공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었는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는 수덕사 대웅전.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는 수덕사 대웅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은 추사의 삶
추사 김정희 선생 기념관으로 이동하자, 분위기는 학문적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의 생애와 사유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히 정리돼 있었다. 청나라 연행을 통해 접한 학문적 자극, 금석학 연구, 제주 유배 시기의 고독과 사유가 글씨의 변화와 함께 펼쳐졌다. 특히 유배 시기의 기록 앞에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간결해지는 추사체는 삶이 압축된 결과”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만년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보문사 판전 현판 두 글자를 완성한 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는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참가자는 “삶 자체가 예술이었다”고 말했다. 끝까지 붓을 든 채 남긴 것은 글씨보다 태도였다.
이은숙(불어교육84) 동문은 전시된 서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글씨가 다 비슷해 보일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다 다른 게 신기하다”며 “같은 사람이 쓴 글씨인데도 분위기가 전부 다르다”고 말했다.
기념관을 나와 고택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안채는 미음자 구조로 외부 시선을 차단했고, 부엌은 따로 두지 않았다. 양반가의 위계가 드러나는 구조였다. 집 안을 천천히 돌다 보면, 화려함보다 절제가 먼저 보인다. 낮은 담장과 단정한 사랑채, 여백이 넉넉한 마당은 화려함보다 호흡을 요구했다. 해설사는 “추사의 글씨가 왜 점점 비워지는지를 이 집에 와서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근처 김흥경(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의 묘소 한켠에 서 있는 백송은 또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다. 줄기 껍질이 하얗게 벗겨진 중국 원산의 소나무. 추사가 연경에서 씨앗을 들여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래된 소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당시 사람들이 백송을 귀하게 여겼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현재 예산 용궁리 백송은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돼있다.
성기훈(체육교육71) 동문은 “문화재 정비가 잘 돼 있어 보기 좋았다”며 “지금도 살아 있는 역사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추사 고택이 꾸준한 관리와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현재로 이어가는 장소라는 점이 체감되는 반응이었다.

추사 김정희 고택의 사랑채. 기둥마다 추사가 쓴 주련(세로로 써 붙인 글귀)이 걸려있다.

추사 김정희 고택의 사랑채. 기둥마다 추사가 쓴 주련(세로로 써 붙인 글귀)이 걸려있다.
화순옹주 곡기 끊고 죽은 남편 따라가
고택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묘역이 나온다. 이 터의 시작이었던 화순옹주(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와 남편 김한신의 합장묘다. 김한신이 39세에 세상을 떠나자, 옹주는 곡기를 끊고 보름 만에 뒤를 따랐다. 조선 왕실 4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순절로 기록된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뜻을 거두지 않았고, 정조는 즉위 후 고모의 절개를 기려 정려문을 세웠다. 묘역을 두른 담장은 왕족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여정 내내 동문들은 서로의 속도를 맞췄다. 오르막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계단을 내려올 때는 “천천히 가세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함께 사진을 찍고 옆 사람의 옷깃을 정리해줬다. 같은 장소를 바라보면서도 각자의 시선은 조금씩 달랐지만, 걷는 속도만큼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화순옹주 묘역의 묘막터.

주춧돌만 남아있는 화순옹주 묘역의 묘막터.
국토문화기행은 꼭 참가한다는 김영철(천문기상67) 동문은 “계속 참여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며 “문화유산을 보는 것도 좋지만, 동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큰 기운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세대가 다르지만 이렇게 함께 걷는 시간이 만족스럽다”고 전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국토문화기행에 참석한 양소유(의학82) 동문은 “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혼자였다면 이렇게 오래 머물며 보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 기행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며 웃었다.
행사 말미, 국토문화기행을 이끈 성봉주(체육교육84) 대장은 참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은 많이 본 날이기도 했지만, 오래 생각하게 될 하루였기를 바랍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올해부터는 국토문화기행을 4회로 늘려, 다양한 지역 탐방을 준비하고 있다”며 “답사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동문들이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수덕사의 고요, 추사의 사유, 화순옹주의 절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이야기였지만, 한 날의 여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군가는 건축을 오래 바라봤고, 누군가는 글씨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으며, 또 다른 이는 묘역의 적막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을 떠올렸다.
이번 기행은 동문들이 함께 걷고 머물며, 역사를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낸 시간으로 마무리됐다. 한편 다음 기행은 4월 2일 강릉 오죽헌과 선교장 탐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이정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