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호 2024년 6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완규
지난 10월 13일, 나는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그 전에 자연과학대학 유재준 학장으로부터 상 수상자로 추천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매우 곤혹스러웠다. 시상증서에는 내가 걸어온 학문과 행정, 국가 공공 분야의 여러 경력을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간의 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서울대학교가 나에게 주는 상이었다.
나는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에 입학한 이후, 4년간의 외국 유학 기간을 제외하면 오늘까지도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아왔다. 2011년 첫 번째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받을 때도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이번에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게 된 것이다.
1946년 예과부를 거쳐 신설된 생물학과에 진학한 나는 새로운 생물학 분야였던 세포학을 전공하였다. 생세포 염색법으로 관찰한 생쥐 세포의 염색체는 매우 신기했으며, 졸업 후에는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항생물질 Streptomycin이 백혈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거치며 생쥐 난소 배란 유도 및 난자 성숙 억제와 관련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유학과 록펠러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실험실을 갖추고 연구에 몰두했고, 제자들은 ‘설랑동문회’를 결성하여 40년 가까이 학술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나의 사후에도 국제적 학회로 발전하길 바라고 있다.
연구에 전념하던 1966년, 나는 예기치 않게 학생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학내는 반정부 시위로 매우 소란스러웠고, 문학부 교수가 맡는 것이 관례였으나 실험실에서만 지내던 내가 그 직을 맡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이미 발령이 난 뒤였다.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을 누그러뜨리고, 철야 농성을 줄이도록 설득하며 동시에 학생들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심지어 형사가 찾는 학생을 숨겨주거나 집에서 재우기도 했다. 결국 2년 임기를 채웠고, 학생들도 내 연임을 바랐다. 이때의 학생운동 주도자들은 이후 손학규, 유인태 등 원로 정치인이 되었고 여러 동창회 지도자도 배출되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의 관악캠퍼스 이전을 앞두고, 나는 갑작스럽게 이학부장 임명을 통보받았다. 불만이 많았지만 맡을 수밖에 없었고, 미국 AID 차관금 5백만 달러를 확보하여 자연과학대학 교수들의 해외 연수와 연구기자재 구입에 배분했다. 이로써 연구 역량이 국제 수준으로 높아졌으며, 이는 정부 차관사업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1975년에는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선배 교수들의 반발이 컸지만 나는 개혁을 추진했다. 교수 공개모집을 실시하여 우수한 해외 박사들을 대거 유치했고, 연구비 중앙관리제도를 도입하여 연구비 사용에 관한 시비를 없앴다. 자연과학대학의 개혁은 다른 단과대학, 나아가 공·사립대학의 개혁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에는 부총장 임명설이 돌았으나 부총장이 본직이던 당시 제도상 정년 전 실직 위험이 있어 제도 개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0·26 사태로 법 개정이 무산되었고, 이후 학생운동 격화로 고병익 총장과 함께 사표를 냈다. 2개월 뒤 권이혁 총장의 배려로 다시 교수로 임명되었고, 이후 1987년 총장이 되었다. 나는 학생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 개정을 추진했다. 교육부는 처음 반대했으나 끝내 승인하였다. 예상과 달리 대학은 조용했다.
총장 재임 중 나는 교수 연구지원 및 학생 장학재단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재단’을 만들고 조동성 교수를 상임이사로 임명하였다. 발전기금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후 삼성 측 지원으로 ‘호암교수회관’이 건립되어 외국 학자 교류 기반이 확고해졌다. 한화가 기부한 300억 원은 중앙도서관 운영체제 혁신에 활용했으며, 전국 국립대학 도서관 협의체 구성에도 기여하였다.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뒤 1년 반 남은 정년 때문에 복직 의사가 없었으나 동료 교수들의 배려로 다시 교수직을 발령받았다. 이는 세 번째 교수 임명이었다. 이후 보직교수들과 ‘4층회’를 꾸려 우의를 이어오고 있다.
1992년에는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명의 훈시 등 관료 체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고, 인천대학교 문제 해결을 위해 재단 이사진 전원을 해임하는 결단도 내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조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인천대학교는 이후 시립대, 그리고 국립대로 승격하였다.
장관 재임 중 국회에서 조순형 위원장은 내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분과위원회를 마무리했고, 그의 발언은 액자로 전달되었다. 1993년 2월 말, 장관직 종료와 함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4년 과학기술아카데미 발기모임에서 나는 ‘과학기술한림원’으로 명칭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즉시 채택되었다. 이후 초대 원장으로 추천되어 한림원을 독립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기존 추천회원 500명 중 40명만을 엄격히 선발하고 100명을 추가하여 총 140명으로 출발하였다. 이 조치는 한림원의 위상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영국 Royal Society,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유수 한림원과 협력 협약을 맺으며 국제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1990년 UN 총회에서 개발도상국 어린이 질병 문제가 논의되었고, 신승일 박사의 제안으로 국제백신연구소(IVI) 설립이 추진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유치가 국가 생명과학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연구공원에 부지를 제공받고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 한국 유치가 확정되었다. 2003년 건물이 완공되고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부 지원 외에도 후원금을 위해 한국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 김재순, 명예회장 이희호 여사가 참여했다. 빌 게이츠 재단도 20년 동안 막대한 금액을 후원했다.
특히 값싼 경구용 콜레라 백신 개발에 성공하여 개발도상국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유바이오로직스가 생산을 맡아 1억 명분 생산을 기록했으며, 한국 로타리클럽도 지원에 동참했다.
연구소 창립 25주년에는 박상대 교수, 신승일 박사, Barry Bloom 박사와 함께 Founder’s Medal을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으로 연구소를 돕고 있다.
이번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은 내가 걸어온 족적을 평가해주는 상이며, 내게는 큰 영광이다. 서울대학교가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하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성실히 봉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