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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호 2026년 2월] 오피니언 교직원의 소리

이로움은 의로움의 조화

이로움은 의로움의 조화

김월회(중문86)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맹자가 어렵사리 알현한 양나라 혜왕을 들이받으며 한 말이다. 혜왕은 “어르신께서 우리나라에 와주셨으니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시렵니까?” 하며 나름 반가움과 기대를 표했던 참이었다. 그런 혜왕을 면전에서 곧장 들이받았으니 과연 유가의 맹장다운 태도였다.

맹자의 이 말은 그가 사숙했던 공자의 견리사의(見利思義), 그러니까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유가의 이익에 대한 관점을 대변하는 언급으로 널리 운위됐다. 덕분에 유가는 이익을 멀리했다는 인식이 옛날부터 줄곧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런데 유가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철학이기도 했다. 그러한 유가가 이익을 멀리하기만 했다면 과연 국가 경영이 가능했을까? 

이익을 멀리한다는 철학이 고결해 보일 수는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실질적 이익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맹자의 통찰처럼 수련한 군자들이야 일정한 수입[恒産]이 보장되지 않아도 변치 않는 도덕심[恒心]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생업에 바쁜 백성은 절대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는 말을 한 다음에 왜 인의를 우선해야 하는지, 그 이유로 인의를 우선하는 것이 결국 국가에 이롭기 때문이라며 매조지했다. 

유가는 사리사욕을 경계했던 것이지 국가 차원의 이익 같은 공공의 이익마저 멀리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공공 차원에서는 이익을 의로움보다 우선시했다. 역경 건괘의 문언전에 실려 있는 “이익은 의로움의 조화이다”라는 언급이 그 증좌이다. 의로움을 이익보다 앞세움은 개인 차원에서는 늘 실천하는 윤리일 수 있지만 사회 차원에서는 그럴 수 없다. 사회 구성원이 지니고 있는 의로움에 대한 기준이 100% 다 같기는 불가능하기에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하나의 의로움만을 앞세울 경우 다른 이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유가는 서로 다른 의로움을 조화시킴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의 근저에는 사람의 본성을 이익과 연계하여 이해한 유가의 전통이 놓여 있다. 맹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순자는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는(好利) 본성을 타고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좋아함은 선악을 따질 대상이 아니다. 좋아함이 과하거나 부족하면 혹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게 되지만, 좋아함 자체를 두고 선악을 판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과하거나 덜하지 않게 좋아함을 실현하며 살아가면 윤리적으로 문제없이 자족하며 살 수 있다. 국가와 위정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 차원에서 좋아하는 바를 과하거나 덜하지 않게 하게 하는 가성비 좋은 방도가 바로 적절한 정책 시행과 타당한 제도 수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