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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호 2026년 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기자에게 엔도르핀이 돌 때는…

온전한 이해가 현장과 만날 때, 대만 TSMC 홍보관서 깨달아, 특종 보도에서는 고단함 느껴
기자에게 엔도르핀이 돌 때는…

하임숙(영어영문91) 
채널A 비즈니스기획본부장
한국여성기자협회장·본지 논설위원
 
온전한 이해가 현장과 만날 때
대만 TSMC 홍보관서 깨달아
특종 보도에서는 고단함 느껴
 
기자 일을 하면서 엔도르핀이 팡팡 터질 때가 언제일까. 특종 했을 때?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특종의 특성상 확인해야할 팩트들이 많아서 취재가 길어지면 새어나갈까 애면글면 했다. 특종을 완성해도 때로 의도치 않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어 신경을 쓰기도 했다. 대단한 특종기자도 아니었지만, 간헐적 특종에서 느꼈던 감정은 일종의 고단함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30여년 기자생활을 꽤 즐겁게 했다. 엔도르핀 팡팡, 까진 아니어도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던 활동 중에는 공장 방문이 있었다.

울산 자동차 공장에서 로봇 팔들이 문짝을 차체에 끼우고 바퀴의 나사를 조이는 장면을 관찰하며, 대한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활동의 일단을 맛보는 즐거움 같은 거 말이다. 한국조폐공사 공장에서는 자르기 전 1만원 권 수십 장이 붙은 지폐가 제조되는 것을 보며 돈도 공산품이라는 사실에 한 번, 지폐가 종이가 아닌 면섬유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그렇다면 지폐가 아닌 면폐여야 하는 게 아닐까). 롯데제과 공장의 긴 생산라인에서 톡 떨어지는 손가락 크기만 한 껌 제품을 봤을 때 깜찍함을 느끼기도 했다.

단순한 관찰이지만 기자가 아니고서야 어느 날은 현대차 직원이, 어느 날은 조폐공사 직원이 돼보는 경험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대만 신주과학단지에 있는 TSMC 홍보관을 방문했을 때 이제 즐거움의 각도가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현장성이 아니라 온전한 이해도 말이다. 그곳에는 실물 공장은 없었지만 그 어떤 생산공장을 방문했을 때보다 TSMC라는 기업의 실체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휴대전화 하나에 반도체가 몇 개나 사용되는지 아세요?” 얼릭 켈리 TSMC 홍보부 프로젝트 매니저의 이 질문에 17명의 기자 중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경제, 산업 기자 생활만 25년이 넘고 동아일보 산업1부장을 지낸 나조차도 몰랐다. 

“모두 30여개가 쓰인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 하나에 반도체 하나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블루투스용, 번역기용 등 다 제각각이다.” 화면에 휴대전화 해부도를 띄워놓고 해당 반도체를 부각해가며 하는 설명은 실제 휴대전화를 열어서 보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이해하게 했다.

회사 소개도 마찬가지였다. 켈리는 “공장에 들어가려면 흰 가운을 입고 에어샤워를 해야 하는데 보안상 불가능하고, 이 화면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화면을 통해 공장에 진입하니 실리콘 원기둥을 자르고 연마해 원형 웨이퍼를 만들고 그 위에 전자회로를 입히는 과정을 실제처럼 생생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웨이퍼가 고객사 요청으로 맞춤형 제품에 탑재되는 것이다.

바로 옆의 대형 화면에는 각종 반도체와 제품들이 그림 액자처럼 걸려있었고 얇은 유리 디스플레이를 좌우로 이동하면 ‘32억 개 인간 게놈 시퀀스’를 고작 1000달러에 전달할 수 있는 칩이라는 설명이 뜨거나 젠슨황 엔비디아 창업주의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화룡점정은 인공지능(AI)으로 구현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방문자들의 질문에 대해 육성으로 답해주는 화면이었다. 제품부터 창업가정신까지, TSMC가 구현하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한 장소에서 모조리 이뤄졌다.

현실과 가상의 전복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지만, 딱 엔도르핀이 돌 만큼의 AI 활용은 매우 유용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이 모든 과정 이후에 실제 생산 현장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더 큰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공장 내부에서 숨 쉬는 공기조차 기업기밀이 되는 시대지만 온전한 이해가 현장성과 만나는 날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