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호 2026년 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숫자로 엮은 생의 매듭
숫자로 엮은 생의 매듭

고화자(약학63)
수필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 아무도 모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처럼, 우리의 생은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서 저마다의 숫자를 꺼내는 거대한 추첨판과 같다. 태어난 날의 기록부터 학번, 집 주소, 전화번호의 끝자리까지. 우리는 무수한 숫자의 향연 속에서 삶의 마디를 엮어간다. 그 촘촘한 그물망 중에서도 내 삶을 가장 오래 붙잡아 온 숫자는 역설적이게도 ‘4’였다.
기억은 중학교 시절, 체육관 바닥에 늘어앉아 구호품을 기다리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이쪽지 하나에 운명을 맡긴 단순한 추첨의 시간. 친구 성은이가 뽑은 ‘4번’에서는 파란 눈을 깜빡이는 눈부신 인형이 나왔다. 반면 ‘1번’을 쥔 내 손에 남겨진 것은 리본을 묶다 만 듯한, 표정 없는 새파란 끈 한 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두고두고 4번을 사랑하게 됐다. 가지지 못한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정은 종종 결핍의 토양 위에서 더 무성하게 자라는 법이다.
그 애정은 때로 지독한 강박이 되어 나를 조인다. 헬스장에서 근력 강화 머신 앞에 앉을 때면 우리 식구 6이라는 숫자때문에 기어코 ‘10회씩 6세트’를 채우고, 이어지는 사이클링에선 굳이 ‘13분’을 고집한다. 1과 3을 더해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4’를 만들고 나서야 페달에서 발을 뗀다. 계기판의 숫자를 맞추며 숫자의 홍수 속을 헤엄치는 나를 보며, 때로는 이것이 집착은 아닌지 스스로 묻곤 한다. 하지만 불안할수록 사람은 셈을 하게 되고, 그 셈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마음의 파도는 잠잠해진다.
시간이 흘러 삶이 데려온 숫자들 역시 묘하게 4를 닮아 있었다. 슬하의 2남 2녀, 도합 ‘4’라는 숫자는 내 생의 견고한 울타리가 됐다. 나는 홀수의 위태로움보다 짝수의 안온함을 신뢰한다. 이제 내게 숫자는 미신을 넘어선 기억의 저장소다. 4는 인형의 푸른 눈동자이고, 6은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8은 희망의 형상이다.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곡선, 눕히면 무한대가 되어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하는 약속 같은 숫자 8. 그래서 나는 행운을 묻는 질문 앞에서 망설임 없이 ‘8’을 말한다. 그것은 끈 한 줄을 들고 돌아섰던 어린 날의 상실감을 보듬고, 숫자에 묶여 있던 자책의 시간을 지나 다시 자유롭게 시작하겠다는 생의 굳건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인생의 초콜릿 상자에서 우리는 늘 달콤한 번호만을 뽑지는 못한다. 그러나 삶의 숙련이란 내가 뽑은 씁쓸한 번호를, 그리고 그 번호에 집착하던 나의 연약함까지 끝내 사랑해 내는 과정이 아닐까. 끈을 들고 울먹이던 아이는 이제 네 아이의 손을 잡고, 여섯 번의 깊은 호흡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여덟(8)의 모양처럼 다시 오뚝하게 일어선다. 삶은 숫자로 묶여 시작되지만, 결국 그 숫자를 관통하며 완성된다. 오늘도 나는 기어코 13분을 채워 페달을 굴리며 내일의 안녕을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