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호 2026년 2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추억의 스테로이드
추억의 스테로이드

백승만(제약97)
경상대 약학과 교수
수능시험 끝내고 방황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 성적 때문인 사람이 있고, 늘어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목표 상실이었다. 수능시험이라는 명확한 결승선이 사라졌다. 어디를 보고 달려야 할지 모르는 채로 대학에 들어왔다. 목표를 찾아다닌 나의 방황은 학부를 다니는 내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런 고민이 한 방에 사라지는 계기가 왔다. 대학원 입학이었다.
대학원은 목표가 분명하다. 졸업이다. 좋은 교수님, 선후배님들과 연구실 생활을 함께 하며 박사 과정에 진학한 이후로는 이 목표가 더욱 멀고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었다. 남들은 대학원이 힘들다 그러는데 나는 대학원 생활이 더 편했다.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방황할 필요 없이 실험만 하면 됐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맘 편하게 실험할 수 있게끔 주변의 동료들이나 교수님께서도 많은 배려를 해주셨던 듯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가 박사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수년간 모은 실험 데이터 정리, 책 한 권 분량의 박사 학위 논문 작성, 수많은 교수님과 연구실 동료를 대상으로 하는 발표 등을 해야 한다. 보통 박사 디펜스라고 부른다. 험난한 과정이다. 나도 졸업 6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들어가려 했다.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그랬다. 급하게 들른 병원에서는 염증을 치료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스테로이드를 처방했다. 약대를 졸업했지만 실제로 스테로이드를 처방 받아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스테로이드라면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들이 홈런 많이 치려고 먹는 그런 약들이었다. 내가 그런 약을 먹는다고? 이거 먹으면 중독되는 거 아닌가? 부작용은? 스테로이드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했더랬다.
그래도 내가 나름 약대 졸업한 약사 아닌가. 별 실력도 없고 아는 것도 일천했지만 괜한 자부심에 학부 때 지식을 떠올렸다. 공부도 별로 많이 안 하긴 했는데 그래도 떠오르는 교수님들의 말씀이 있었다. 약은 온몸에 퍼지기 때문에 필요한 장기에는 약이지만 그렇지 않은 장기에게는 독이라는 말씀이었다. 스테로이드라고 뭐 다르겠는가. 염증이 생긴 부위에는 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른 부위에는? 근육이 커지지 않을까? 체력도 좋아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박사 졸업에 도움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국가대표도 아니고 도핑 검사 받지도 않을 건데 신경 쓸 게 뭐 있겠는가. 아파서 먹기 시작한 스테로이드를 그냥 새옹지마려니 하면서 받아들이게 됐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나의 박사 졸업 분투가 시작됐다. 마지막 도서관 셔틀버스를 타고 녹두 거리 자취방에 오면 11시 반 정도. 다음 날 아침에 학교를 가면 7시 이전에 도착했다. 이런 생활을 6개월 넘게, 즉 박사 졸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지속했다. 조금 일찍 눈이 떠지면 출근도 일찍 했는데 그 버스에 출근하던 우리 건물 경비원 아저씨가 타고 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내가 그 건물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던 적도 꽤 있었다. 놀라운 체력이었다. 중간에 몸살 한번 심하게 했던 것을 빼면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별로 피로를 느끼지도 않았다. 야구 선수들도 이런 맛에 스테로이드에 빠지는 걸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가장 힘든 시기 6개월을 스테로이드와 함께 넘었다.
시간이 흘러 박사후과정을 거쳐 대학교수로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10년 넘게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새로운 일이다. 일단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알아야 가르치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스테로이드 중에서도 염증을 치료하는 스테로이드와 근육을 키우는 스테로이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 내가 먹었던 스테로이드는? 근육과는 별 상관없는 스테로이드였다. 엄밀히 말하면 근육이 빠지는 약이다. 염증만 치료한다. 하지만 나는 힘이 났는데? 체력도 넘쳤는데? 완벽한 플라시보 효과다.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에 힘이 났을 뿐이었다.
약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정작 자기가 먹는 약도 제대로 모른 채 먹었다는 사실이 어이없긴 하다. 그런데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지 않을까? 스테로이드가 하나의 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놀라운 치료 효과를 막연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를 주제로 사람들에게 좀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흔히들 ‘약은 독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전체 문장이 더 중요하다. ‘약은 독이고, 독은 약이다. 중요한 건 양이다’라는 말이다. 양에 따라 목적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은사님들께서도 항상 강조하셨던 말씀인데 스테로이드를 떠올리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