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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2026년 1월] 오피니언 논단

영원한 적도 친구도 규범도 없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규범도 없다

전재성(외교8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원장
 
새해가 밝아오면서 기존의 국제질서가 저물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새로운 국제질서가 출현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의 구조적 기능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압도적 힘을 보유한 미국이 단극 체제를 유지하며 질서 유지에 필요한 공공재를 단독으로 공급해 왔던 것이 지난 시대의 국제질서였다. 그러나 9·11 테러, 세계 금융위기,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미국의 능력만으로는 세계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미국의 리더십 전략은 국내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부담으로 작용했고 해외 개입의 비용을 전략적 낭비로 인식하는 미국우선주의 세력이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슈퍼파워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같은 경쟁국의 위협에 종속되지 않는 자립적 경제·기술 공급망을 확보하고,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며, 동시에 미국 내부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대전략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 문서 역시 미국이 어떤 국제질서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밑그림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만 해외 문제에 개입하겠다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현실주의 원칙만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조 아래 2026년 초부터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에 착수하고 있다. 서반구에서는 베네수엘라 개입을 계기로 미국 본토의 안보를 강화하는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분쟁들 사이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중국과의 전략 경쟁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놓여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개입을 유지하며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중국이 지역의 지배적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한다. 제1도련선을 둘러싼 중국의 세력권 확대에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한국, 일본, 호주 등 동아시아의 동맹국들과 함께 중국의 세력권이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올해 군사적 상호 견제가 실제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양국 모두 국내 정치와 경제의 취약성, 향후 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을 안고 있어 고강도의 군사적 대결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미 미중 관세 갈등 과정에서 양국의 취약성이 상당 부분 노출되었고, 특히 미국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과, 2027년 시진핑 주석의 4연임을 결정할 당대회를 앞둔 중국 모두 국내 정치적 고려 속에서 전면 충돌을 피하면서 전술적 데탕트 국면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미중 간 유화국면이 곧바로 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최근의 중일 갈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대만 유사시 일본의 개입 가능성” 발언 이후 중일 관계는 외교적 갈등을 넘어 전면적 대립 국면으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중국은 이를 자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일본산 수산물 수입 재개 금지, 중국인의 일본 관광·유학 자제, 일본 문화·공연 제한 등 이른바 ‘한일령’식 경제·사회적 보복을 단행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올해 들어 중희토류 전 품목과 갈륨·게르마늄·안티몬·흑연 등 핵심 전략물자의 수출을 사실상 차단하고, 중국 기술이나 자원이 포함된 외국산 제품에도 허가를 요구하는 역외 규제를 도입함으로써 일본과 미국 동맹권의 공급망 전체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향후 외교전략과 국제질서는 미국 뿐 아니라 동맹국들의 대응에 의해 함께 결정된다. 한국은 미국에 필요한 기능적 기여를 제공하되 우리가 원하는 국제질서의 방향을 확보해야 한다. 동맹의 실리화 속에서도 보편적 가치와 전략적 자율성을 결합하는 외교가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모범 동맹’의 본질이다. 이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규범도 없다는 인식 아래에서 한국이 국익을 위한 외교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는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이 험난한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친구를 찾아내고, 잠재적 적을 경계하며, 무엇보다 한국에 가장 유리하면서도 정당한 국제질서의 미래를 위해 어떤 규칙과 규범을 세워 나갈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질서 조성 외교와 국익을 위한 자강 외교가 두 축을 이룰 때, 한국은 약소국이 아니라 선진국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