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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2026년 1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문화, 통일 국가의 미래 전략 

문화, 통일 국가의 미래 전략 

손은신(산업디자인82) 
K메세나네트워크 이사장 
 
압록강은 동서로 흐르고, 탐진강은 남북으로 흐른다. 탐진강은 내 고향 전남 강진군의 주작산과 월출산 끝자락을 따라 조용히 이어진다. 강물은 스스로의 방향을 따라 흐를 뿐, 경계를 만들지 않는다. 경계와 막힘을 주장하지 않고, 흐름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러나 한반도의 현실은 여전히 경계와 긴장 위에 놓여 있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역사는 종종 이처럼 다른 궤적을 그린다.

오늘의 동아시아 정세는 불확실성과 갈등이 중첩된 긴장 국면의 연속이다. 남북 관계는 물론 한·중·일을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 역시 쉽게 해법을 찾기 어렵다. 군사적 긴장은 반복되고, 평화는 분명한 목표라기보다 신중하게 유보된 언어로 다가온다. 이러한 시점에 남북한 전시 ‘평화, 바람이 분다’를 준비하는 일은 자칫 현실 인식이 부족한 이상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는 군사력과 외교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자국 중심 힘의 논리는 경계를 관리할 수는 있어도, 신뢰를 축적하지는 못한다.

이번 전시는 정치적 선언이나 제도적 해법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예술이 분쟁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작가들의 창조적 에너지가 작품을 매개로, 긴장이 고착되는 시간 속에서 신뢰와 공감의 토대를 축적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남북한 문화예술 교류는 즉각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가장 오래 지속 되며 쉽게 소진되지 않는 힘을 지닌 영역이다.

‘평화,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결국 풍경을 변화시킨다. 문화예술 역시 단기적 효과를 약속하지는 않지만, 사회의 공동체 인식과 감각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이 전시는 평화를 결과로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묻는다.

남북한 예술가들이 같은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일은 체제의 통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역사와 기억, 경험을 인정하는 출발점에 가깝다. 예술은 차이를 지우지 않는다. 차이를 드러낸 상태에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기간의 성과로 환산되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갈등을 완화하고 신뢰를 축적하는 중요한 평화의 자산이 된다.

분쟁의 시대에 문화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의 품격과 지속 가능한 평화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축적 위에서 형성된다. 강물은 오늘도 동서남북으로 묵묵히 흐르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평화, 바람이 분다’ 전시는 문화가 통일 국가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보여주는 시도다. 단기적 성과보다 긴 호흡의 신뢰를 선택하는 일, 지금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