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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2026년 1월] 문화 나의 취미

심장 수술 5000례, 28년 경력 흉부외과 의사가 와인에 빠진 까닭은

전문 과정 WSET 레벨3 취득 “와인과 의학은 닮았어요”
심장 수술 5000례, 28년 경력 흉부외과 의사가 와인에 빠진 까닭은
 
김경환(의학84)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김경환 교수가 와인잔을 들어보이며, 와인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문 과정 WSET 레벨3 취득 
“와인과 의학은 닮았어요”

와인잔은 납작한 바닥 위에 스템(stem)이 서 있고, 볼은 아래에서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다시 모인다. 김경환(의학84)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익숙하게 스템을 잡고 림(rim)을 가볍게 돌려 보이며 말했다. “이 구조는 향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오랜 시간 고위험 심장 수술 현장을 지켜온 흉부외과 의사가 와인을 공부하게 된 이유를 듣기 위해, 12월의 끝자락 연건캠퍼스 연구실을 찾았다. 

잔의 아래쪽은 향이 머물 공간을 만들고, 위로 좁아지는 림은 흩어질 향을 한 점으로 모아 코로 끌어올린다. 그는 “와인을 따를 때 최대 직경 바로 아래까지만 채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남겨둔 공간이 있어야 스월링으로 향이 올라오고, 그 향을 잔 안에 붙잡아 둘 수 있다. 와인잔은 멋을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와인의 상태를 읽기 위한 장치다. 잔의 곡선부터 병의 어깨 각도, 오크통의 크기까지. 와인의 세계는 생각보다 많은 ‘이유’로 구성돼 있다.

김 교수가 와인에 빠진 이유는 맛보다 먼저 ‘이해’였다. 코로나19로 해외 학회와 출장이 멈추며 생긴 시간에 그는 와인 공부를 시작했다. 가볍게 접근할 생각이었지만, 곧 예상보다 넓고 깊은 세계가 펼쳐졌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 공인 교육기관 WSET 과정을 밟아 레벨3까지 이수했고,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와인을 다루는 미국 WSG 심화 과정도 이어서 마쳤다. 한 해에 모두 끝낸 일정이었다.

“양은 많았지만, 공부 방식은 의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는 먼저 큰 흐름을 잡고, 그 위에 세부를 얹는다. 포도 품종과 산지, 기후 조건, 양조 방식은 서로 분리된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 연결돼 있다. 발효는 당과 효모의 반응이고, 숙성은 시간과 산소의 균형이다. 와인에 화학과 물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의학과 와인은 닮아 있었다. 심장 수술 역시 감각이나 손기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김 교수는 “수술은 결국 물리학과 화학의 집합”이라고 말했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향과 맛을 느끼기 전에,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이해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와인은 파고들수록 흥미로워진다.

그는 와인을 ‘기다림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오크통에서 가장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던 와인이 병에 담긴 뒤, 다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병을 열고 바로 마시기보다 공기와 접촉하며 서서히 깨어나야 제맛이 난다. 와인병의 모양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진 어깨의 보르도 병은 침전물을 가라앉히기 위한 구조이고, 완만한 곡선의 부르고뉴 병은 피노 누아처럼 섬세한 와인을 담아왔다. 동시에 병의 형태는 산지와 스타일을 드러내는 일종의 역사이자 브랜드다. “와인은 서두르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언어도 다시 공부했다. 와인의 이름과 지명은 대부분 현지 언어로 쓰인다. 발음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의미도 흐려진다. 김 교수는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초급 수준으로 익혔다.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서였다.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은 그 지역과 시간을 함께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와인에 대한 편견도 짚었다. 그는 “와인은 어렵다는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격이나 브랜드보다 중요한 것은 취향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고가 와인이 늘 높은 평가를 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와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호식품입니다.”

이런 인식은 병원 회식 문화에도 스며들었다. 빠르게 마시고 취하는 술 대신, 와인을 놓고 천천히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향만 즐겼다.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부담은 줄었다.

김 교수는 와인 강의도 수십 차례 진행했다. 그는 잘 마시는 법보다, 어떻게 접근하면 되는지를 먼저 설명했다. 잔을 잡는 법, 기다리는 시간, 향을 느끼는 순서. 몇 가지만 알면 와인은 훨씬 가까워진다.

김 교수는 심장 수술만 5000례 이상 집도한 흉부외과 의사다. 그러나 이 숫자를 개인의 성취로 말하지 않는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는 전국에서 가장 고위험군의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고, 수술 건수는 능력의 증명이라기보다 책임의 누적에 가깝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이 부담을 개인의 헌신에만 맡기는 구조는 오래갈 수 없다고 봤다.

전자차트 도입과 의료정보시스템 구축, 헬스케어 IT 분야에 20년 넘게 관여해 온 것도 같은 문제의식에서였다. 판단의 근거가 기록으로 남고, 과정이 공유돼야 위험을 함께 감당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를 ‘공평함이 아니라 공정함의 문제’라고 말했다.

와인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와인에 다가가길 바랐다. 그래서 모든 테이스팅은 블라인드에서 시작했고, 이를 위해 스스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알수록 재미있고, 계속 새로운 페이지가 열립니다.”

김 교수가 준비 중인 WSET 레벨4 디플로마는 전 세계 와인을 하나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과정이다. 지식만 확인하는 시험이 아니라, 산지와 기후, 양조와 유통을 맥락으로 읽어내는 훈련에 가깝다. 그에게 와인은 의학과 마찬가지로 평생에 걸쳐 이어가는 과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와인을 따를 때 잔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본다”고 말한다. 푸어링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김경환 교수에게 와인은 취미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였다. 송해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