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호 2025년 12월] 뉴스 기획
옛 공대 늪에는 분수대, 사대 횃불 청년상은 관악으로
과기대 들어선 옛 공릉동 공대, 용두동 사대 터에는 표지석만…, 이학부 자리엔 미주아파트, 장충단로13길엔 약대 흔적만
옛 공대 늪에는 분수대, 사대 횃불 청년상은 관악으로


(왼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인 옛 공릉동 본관 건물. (오른쪽) 종합화 이전 서울공대 캠퍼스 전경.
과기대 들어선 옛 공릉동 공대
용두동 사대 터에는 표지석만…
이학부 자리엔 미주아파트
장충단로13길엔 약대 흔적만
사람의 기억은 시간보다 공간을 더 오래 붙든다. 십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릴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날짜나 연도가 아니라 그곳의 냄새와 바람, 그리고 풍경이다. 하여 서울대의 옛 캠퍼스들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라, 학문의 숨결과 청춘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소다.
지난 호(연건·동숭·종암·수원) 기획이 나간 뒤,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동문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동숭동에서 문리대를 다녔던 기억, 종암동에서 보낸 청춘, 수원 농대 실험실의 풍경까지, 공간은 각자의 시간을 다시 불러냈다.
이번 호에서는 공릉동·용두동·청량리·소공동 등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서울대의 옛 캠퍼스를 따라 종합화 50년의 뿌리를 다시 더듬어본다.
7층 타워에 남은 공대 흔적
첫 목적지는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위치한 공릉동 옛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부지다. 이곳은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로 조성돼, 해방 이후 경성대학을 거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개편됐다. 보존이 잘된 공대 본관(현재 다산관)은 중앙에 7층 타워를 세운 상징적 건축물로, ㅁ자 배치와 중정 구조가 특징이다. 중앙 현관의 차량 통과용 포치가 남아 있어 당시 공대 행정과 주요 학과가 모였던 중심 건물임을 보여준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에도 고급 자재를 사용해, 건물 배치와 형태에 권위와 기능을 동시에 추구한 근대건축 양식이 드러난다.
본관 오른편의 2호관(현재 창학관)은 금속과·화학공학과·원자핵공학과 등이 사용하던 실험·강의동으로, 중정형 평면과 반복된 세로창 등 근대건축의 기능주의적 설계가 뚜렷하다.
남쪽의 광산학과 실험동(현재 대륙관)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일렬형 건물로, 양쪽 끝에 강당과 무도장이 배치된 구조가 남아 있다. 현재도 긴 축선의 건물 형태는 당시 학과 배치와 공간 운영 방식을 유추하게 한다.
캠퍼스 뒤편의 붕어방 연못은 과거 공대생들이 ‘공대 늪’이라 부르던 늪지대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분수대로 조성된 연못과 산책길이 들어섰다. 과기대 시설관리 관계자는 “정확히 같은 지점이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일대가 늪지였던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서울대학교 40년사’는 공릉동 캠퍼스를 “푸른 솔밭 기슭 5만 평 대지 위에 건평 1만 평이 넘는 건물들이 자리했고, 늪 주변 벤치에서 학생들이 종종 머리를 식히곤 했다”고 기록한다. “시계탑을 중심으로 실험동이 늘어섰고, 도심과 떨어진 환경 덕분에 공대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뜨거웠다”는 ‘대학신문’(1956.10.15)의 묘사도 있다. 공과대학은 1979년 관악으로 이전하기까지 약 33년간 이곳 공릉동에서 성장했다.
선농단 향나무 아래 남은 사범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동대문구 용두동 선농단 일대다. 제기동역 인근 선농단 유적지 입구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 표지석과 이 일대가 과거 서울대 부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친히 밭을 갈던 선농단에는 지금도 수백 년 된 향나무와 옛 지형이 남아 있다.
사범대학이 용두동에 있던 시절, 학생들은 교사 뒤편 동산을 ‘청량대(淸凉臺)’라 불렀다. 동산 중앙의 ‘청량대’ 비석은 사범대의 상징이었고, 축제명과 교지에도 이 이름이 사용됐다. 옛 교사 앞에는 4·19혁명 희생자인 손중근(국어교육57), 유재식(체육교육57) 동문을 기리는 ‘횃불 청년’ 동상이 세워졌으며, 현재는 관악캠퍼스 4·19기념탑 곁에 옮겨져 있다.
문리대 이학부 표식도 없어
이어 찾아간 곳은 서울대 문리대 이학부가 있었던 청량리 부근이다. 현재 청량리세무서와 미주아파트가 들어선 이 일대는 서울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조차 남아 있지 않다. 1976년 준공된 미주아파트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주변 환경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한국 과학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펼쳐졌던 장소였다. 1923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본관이 준공되고, 1924년 첫 입학생이 들어오면서 이 자리는 고등교육의 출발점이 됐다. 1948년 대학 예과가 폐지된 뒤에는 문리대 이학부가 이곳으로 옮겨왔고, 전쟁으로 파손된 시설을 보수해 1958년 의예과와 물리학과 실험실이 다시 문을 열었다. 1965년에는 IQSY(국제태양정온년) 한국위원회가 우주선·지자기 관측 사업을 수행한 장소이기도 했다.
고 한상복(물리59) 동문은 블로그에 “청량리는 한국 과학 교육의 초기 기반이 마련된 곳이자,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기억이 남아있던 공간”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1966년 동숭동 과학관의 완공과 함께 이학부가 옮겨가자, 청량리 부지는 매각됐고 그 위로 미주아파트가 들어섰다. 서울대의 중요한 역사 한 장면이 사실상 ‘기억의 공백’으로 남았다.
비석만 남은 치과·약학대학
소공동 한국은행 본관 뒤편에는 경성치과의학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1922년 설립된 경성치과의학교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모태이자 한국 근대 치의학 교육의 출발점이다. 이 표지석은 2017년 치의학대학원·치과병원·치대동창회·한국은행이 협력해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세운 것으로, 옛 치과교육 공간의 위치를 남기기 위한 취지였다. 도로변에 설치됐다가 한국은행 별관 증축 후 화단 안으로 옮겨졌다.
동대문평화시장 근처 을지로6가 장충단로13길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2015년 약학대학·약대동창회·중구청이 세운 것으로 이 일대가 근대 약학 교육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알리기 위한 취지다.
약학대학의 실질적 초기 교사는 소공동 롯데영프라자 일대에 있었다. 조선약학교는 1919년 을지로6가에 단층 기와집 교사를 마련한 뒤, 1933년 이곳에 붉은 벽돌로 ㄱ자 모양의 근대식 건물을 신축해 1959년까지 사용했다. 약대가 연건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은 음대가 1975년 관악 이전까지 사용했다. 이후 민간 소유를 거쳐 1987년 철거돼 건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게 됐다. 현재 표지석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새로 세운 체육시설 담장 옆으로 밀려 있었고, 비문은 오염·풍화로 희미해져 의미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예술대학도 도심 곳곳에 교사를 두고 이동해왔다. 음악대학은 동숭동 시절을 거쳐 을지로 전 약대 교사를 약 16년간 사용하다 1975년 관악으로 이전했다. 미술대학은 동숭동 예술대학 시절 이후 1963년 연건동 전 수의학과 교사로 옮겨왔고, 1972년에는 공릉동 교양과정부 건물로 이전한 뒤 1976년 관악에 정착했다.
흩어지고 남은 자리들
공릉동의 붉은 벽돌, 용두동의 표지석, 을지로의 바랜 비문, 자취조차 없는 청량리까지. 옛 캠퍼스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울대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옛 캠퍼스 기록을 꾸준히 조사해 온 주정훈(환대원03) 동문은 “표지석이 흩어져 있는 현재 상태로는 공간사의 맥락을 남기기 어렵다”며 “대학 본부나 동창회 차원의 통일된 안내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종합화 50주년을 맞은 올해, 사라진 공간을 다시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서울대의 정체성과 역사적 층위를 다음 세대로 잇는, 새로운 50년의 출발점이다 송해수 기자
*지난호 수원 캠퍼스 기획 기사에서 농생명과학대학의 출발을 1918년이 아닌 1906년으로 바로잡습니다.





1. 옛 문리대 이학부 자리의 청량리 미주상가. 2.사범대가 위치했던 선농단 일대의 향나무. 3. 용두동 사범대 표지석. 4.중구청 앞 체육시설 구석에 위치하게된 약대 표지석. 5.한국은행 뒷편의 치과대학 표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