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호 2025년 12월] 오피니언 논단
‘숙의 공론장’ 회복, 시급한 민주화 운동
‘숙의 공론장’ 회복, 시급한 민주화 운동

문재완(공법81)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다. 이러한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 인터넷은 민주적 공론장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을 받았다. 소수의 신문과 방송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던 세상에서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시장이 열리고, 다양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2000년 5월 네이버가 15개 신문사 및 통신사의 뉴스를 통합해 제공하자 사람들은 여러 언론사의 기사를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 환호했다. 1999년 디시인사이드, 2004년 다음 아고라 등 인터넷 기반 커뮤니티가 등장하면서 누구나 토론하고 여론 형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져갔다. 인터넷은 자유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체험 현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터넷 공론장의 한계는 점점 분명해졌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의 조건 가운데 인터넷은 접근 개방성과 참여 평등성을 충족시키지만, 가장 중요한 이성적 숙의라는 요소를 실현하지 못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평등해 보이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 공론장을 위협하는 요인으로는 첫째, 뉴스 소비의 편향성이다. 이용자는 선호하는 정보만 선택하고, 플랫폼은 이를 강화하는 맞춤형 뉴스를 제공한다. 파편화된 뉴스 환경은 서로 다른 관점과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줄여 숙의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확증편향과 집단 극단화는 인터넷 구조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둘째, 불법정보와 가짜뉴스의 확산이다. 명예훼손과 허위정보는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인터넷의 신속성·확장성·복제성은 문제의 크기와 영향력을 전혀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의도된 허위정보, 즉 가짜뉴스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왜곡하고,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을 침묵시키며 공적 토론 자체를 마비시킨다.
셋째, 공론장의 집중화다. 인터넷은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전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 정보 유통은 소수 플랫폼을 통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절대 강자다. 이들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광고 기반의 비즈니스를 영위한다. 하버드대 교수 쇼샤나 주보프는 이를 ‘감시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알고리즘 기반의 개인형 서비스는 필터 버블을 만들고, 이용자는 유사한 성향의 사람들만 모인 공간에서 그들의 소리만 듣는 에코 챔버에 갇히게 된다. 이는 인터넷 공론장을 양극화시키고, 다양한 관점의 교류를 저해해 공론장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킨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과거 신문·방송이 과점화됐을 때 국가 개입이 정당화됐던 것처럼, 오늘의 플랫폼 환경 또한 공론장 보호를 위한 공적 조정이 필요하다. “인터넷은 표현 촉진적 매체이므로 규제에 신중해야 한다”고 본 2002년 헌법재판소 결정(99헌마480)은 이제 수정이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대로 말할 자유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보와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며 숙의가 가능한 공론장을 구축하는 일이다. 미국 정치철학자 알렉산더 마이클존이 말했듯, 표현의 자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말해지는 것”이며, 그 구조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헌법적 책무다.
표현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로만 이해하면 인터넷 공론장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권리이며, 개인의 표현이 민주적 질서 형성에 기여할 때 비로소 헌법적 권리로 인정된다. 국가는 표현의 자유가 본래 목적을 수행하도록 공론장을 형성·보호할 의무가 있다. 이는 외형상 규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지키기 위한 헌법적 장치다.
인터넷 공론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형 플랫폼에 공론장 기여 규범을 법적으로 부과해야 한다. 방송에 공정성 의무를 부과하듯, 플랫폼에게 다양한 정보 제공의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 이용자가 평소 접하지 않는 유형의 정보에도 접근하도록 알고리즘 설계를 유도하고, 콘텐츠 모더레이션은 국가가 정한 불법정보 기준과 정합성을 갖추어야 하며, 정보 삭제 등 불이익을 받은 이용자에게는 적법절차가 보장되어야 한다.
인터넷 공론장의 한계를 단번에 해결할 묘책은 없다. 그러나 첫걸음은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적 의사형성에 기여하는 표현은 강력히 보호하되, 불법정보를 규제하고 다양한 관점의 정보가 제공되는 구조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민주화 운동은 숙의가 가능한 공론장을 되살리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