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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2025년 12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관악의 낭만에서 시작된 나의 반세기

관악의 낭만에서 시작된 나의 반세기

이은기 (대학원77) 
변호사·전 서강대 교수
 
재작년 칠순을 맞아 평소 써 놓았던 시들 중 100편을 골라 우연히 알게 된 페스트북에서 POD출판(Publication on Demand, 책값을 지불한 독자의 주문이 들어오면 인쇄, 배달해 주는 방식)으로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을 접한 기자분이 연락을 해 와 이 글을 쓰게 됐다. 거의 50년 전인 대학원 석·박사과정 5년, 그 이후 기억을 소환하고 제 애들 얘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1977년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관악캠퍼스는 캠퍼스 이전 초기라서 현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교문 우측 도림천을 따라 관악산 오르는 등산로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말끔히 정비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였다.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가옥이 한 채 있었고 등산객들을 상대로 막걸리를 팔았다. ‘아를르의 여인’ 멜로디가 귓가에 아른거리고 싱그런 라일락 향기가 코끝에 스치는 봄날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책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공부가 안 된다는 핑계로 오래전 고인이 된 친구를 꼬드겨 담 없는 천변 비탈을 내려가 내를 건너가 막걸리를 몇 잔 들이키고 올라오기도 했다. 잔디밭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책 장사 아저씨들이 세계철학대전집을 사라고 추근대던 시절이었다. 법서 읽기가 지루해지면 학부 때 엉겁결에 구입해 놓고 읽으려 했으나 잘 이해가 안 돼 밀쳐 놓았던 철학서들을 펼쳐 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술술 읽혀 대학4년의 지력 향상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82년 석사논문을 준비해 논문 통과가 확정됐다. 그런데 졸업사정 단계에서 석사과정 24학점 이수요건에서 3학점 미달이 확인됐다고 법대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아뿔싸, 김도창 교수님의 행정법(3학점)을 실수로 중복수강하는 바람에 3학점이 부족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등록금이 대폭 인상돼 한 학기 등록금으로 입대 전 네 학기 등록금을 다 합친 액수를 내야 했다. 입학 때만 등록금을 납부했고 당시 서울대 대학원 중심대학정책의 수혜로 나머지 3학기는 등록금 전액 면제로 다녔으니 부주의한 과실의 대가치고는 너무 커 지금도 웃어넘길 수 없는 추억이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1983년 공기업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휴직하고 아쉬움에 다시 시험공부를 하게 됐다. 시험운이 닿았는지 박사과정 입학시험도 합격했고 이어서 사시도 합격했다. 잠시 김철수 교수님의 사법제도개선방안에 관한 프로젝트일을 돕기도 했다. 박사과정에서는 세 분 행정법 교수님들(서원우, 김동희, 최송화 교수)의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95년 박사학위논문 주제는 주거권에 기한 주택행정법이었는데 우연히도 20년 후인 2015년에 주거기본법이 제정됐다. 

세 분의 초기 제자들이 주도해 1989년 소생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행정법이론실무연구회’ 창립모임을 가졌다. 항상 세 분 참석하에 학회가 열렸는데, 창립 36년째인 올해 6월 제268회 학회가 열렸으니 큰 보람을 느낀다. 학회에서는 매번 열띤 토론이 이뤄졌는데, 선생님들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토론이라며 제자들을 격려해 주셨다. 학회 후 신림동이나 서초동 등지에서 한 저녁 회식은 또 다른 배움의 장이자 낭만이었다. 선생님들과 같은 전공을 하는 선후배가 같이 한 자리였기에 토론을 통한 배움은 계속됐다.
‘학(배움) 뒤에는 술이 있어야 학술대회’라는 궤변까지 낳았다. 세 분 선생님들은 모두 타계하셨지만 제자들은 모교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행정법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길러내고 있다. 소생은 변호사로서 실무도 경험했지만 선생님들의 학은 덕에 로스쿨 출범 준비 중이던 2006년 실무교수로 임용되어 1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제 1970년대 후반에 대학원에 입학했던 회원들은 물론 1980년대 초반에 입학한 후배 교수들도 정년퇴임을 했다. 스승 세대에 이어 우리 세대도 물러난 세대가 됐다. 소일하러 서초동 사무실에 나가고 있지만, 세대교체라는 자연법칙을 격세지감으로 느끼고 있다. 

큰딸애는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를 합격했고, 아들은 사회대를 졸업하고 창업해 회사 대표로서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 한 명도 못 보내는데 두 명 다 서울대 보냈다며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세간에는 ‘자녀의 대학입시 성공을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조합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우스개가 한때 유행했다. 아빠의 무관심 말고는 별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은데 성공한 셈이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애들에게 책을 많이 읽는 게 좋다고는 말했지만 공부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게 주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70년이 넘는 세월을 살고 보니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능력 면으로나 성과 면으로나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좀 있어야 여유로운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