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호 2025년 12월] 문화 맛집을 찾아서
안양 박달동 골목서 직접 빵 굽고 커피 내립니다
직접 블렌딩·로스팅한 원두,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
안양 박달동 골목서 직접 빵 굽고 커피 내립니다
오재훈(항공우주86)·임명선(간호90)
베이커리 카페 행피나 대표


오재훈 동문이 주방에서 빵에 쿠프(칼집)를 넣고있다.
직접 블렌딩·로스팅한 원두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
안양 박달동의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공기 속에 은은한 원두 향이 스며든다. 향을 따라가면 한쪽에 단정히 자리한 간판이 보인다. 문을 열면 구수한 향과 함께 오재훈(항공우주86) 동문의 따뜻한 인사가 손님을 맞는다. 공간은 안정감 있어, 자연스레 편안함을 준다. 단골들은 “커피 맛도 좋지만, 먼저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라고 말한다.
행피나(행복이 피는 나무)는 오재훈 동문과 임명선(간호90) 동문 부부가 2017년 3월 함께 문을 연 카페다. 항공공학과 간호학이라는 외식업과는 다소 다른 길은, 이 부부가 이곳에 이르게 된 사연을 궁금하게 만든다. 오 동문의 이력은 조금 특별하다. 군 복무 중 우연히 읽은 잡지를 통해 인터넷의 가능성을 보고 인터넷 사업(커피 제조업)에 발을 들였다. 이후 삼성물산에서 직장 생활을 한 뒤, 10여 년간 전업육아를 했다. 그러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만들어주던 것들’을 들고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의 메뉴는 사업용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족과 나누던 음식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행피나의 맛과 정직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카페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직접 만든다’는 원칙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쪽에 놓인 원두 로스터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모든 메뉴가 주인의 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한국에 원두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전이던 90년대 후반부터 책과 해외 자료로 커피를 공부해온 그는, 일본에서 로스팅을 배우며 자신만의 방식을 완성했다. 원두뿐 아니라 파니니·와플·요거트·각종 청 등 행피나의 대부분의 메뉴도 하나하나 수제로 만들어진다. 아마존에서 공수한 수십 권의 커피·빵·요리 서적들은 지금도 카페 한쪽 벽면에 놓여 지난 과정의 시간과 철학을 짐작케 한다.

카운터에서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오재훈·임명선 동문 부부.

카운터에서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오재훈·임명선 동문 부부.
행피나의 커피는 네 가지 생두를 직접 블렌딩해 로스팅한 원두로 만든다. 산미 중심 블렌드와 밸런스 중심 블렌드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으며, 지역 단골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선택지다. 같은 원두라도 에스프레소·핸드드립·콜드브루 등 추출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기 때문에, 한 원두로 여러 층위의 풍미를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다.
음료와 디저트에서도 ‘진짜 재료’에 대한 집요함이 드러난다. 국산 딸기로만 만든 딸기 스무디, 직접 담근 레몬청, 수제 요거트를 사용한 브라우니, 요구르트 반죽이 들어가는 와플, 유기농 통밀빵으로 만드는 파니니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 빵 발효에 쓰는 천연 효모도 직접 키워 사용한다. 바닐라 시럽과 캐러멜 소스 역시 시판 제품 대신 매장에서 제조한다. “시판 바닐라 시럽에 바닐라가 하나도 안 들어간다는 거 아세요? 대부분 인공 향이에요. 향으로 속이는 건 가능하면 줄이고 싶었어요. 카페에서는 최대한 ‘진짜’ 재료를 쓰자는 게 원칙이에요.”
오 동문은 공학도로서의 기질을 음식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엔지니어는 정답을 찾는 사람”이라는 대학 시절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며, 수없이 시도하고 섞어보고 실패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메뉴를 완성해왔다. 그는 문제 해결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대표 메뉴를 묻자 오 동문은 “아메리카노는 기본이고, 파니니는 꾸준히 사랑받는 메뉴”라고 소개한다. 직접 구운 유기농 통밀빵에, 속 재료인 햄·불고기·닭가슴살 수비드 등도 모두 손수 만든다. 통밀 특유의 고소함과 따뜻하게 눌린 빵의 풍미, 그리고 신선한 재료의 조화는 행피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메뉴다. 손님의 기분을 살피며 “힘들어 보이시는 날엔 카라멜 마키아토를 권한다”는 것도 행피나만의 문화다.
오 동문의 빵에는 규격화된 완벽함보다 ‘아티잔 브레드’의 여유가 담겨 있다. 하루하루 온도·습도·발효의 상태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받아들인다. 완벽한 균일함을 추구하기보다 좋은 재료와 정직한 과정이 주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빵은 공장에서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장인 빵은 매번 조금씩 다를 수 있어요. 그게 오히려 매력이죠.”
행피나가 맛집을 넘어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자리 잡은 데는 오 동문의 철학이 깊게 깔려 있다. 그는 레이 올덴버그의 저서 ‘더 그레이트 굿 플레이스(The Great Good Place)’를 통해 얻은 ‘제3의 장소’ 개념에 강하게 공감한다. 집(프라이빗·인포멀)과 직장(퍼블릭·포멀) 사이, 퍼블릭하면서도 인포멀한 장소. 누구나 슬리퍼 끌고 나와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공간. “저는 이 카페를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동네 사랑방 같은 곳. 가족은 아니지만 이웃으로 만나고, 잠시 쉬어가고, 때로는 말없이 머물다 가는 곳.”
카페 운영 9년 차를 맞은 지금도 그는 “여전히 설레면서 문을 연다”고 말한다. 심지어 손님이 없어도 마음이 ‘가득 차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오픈 초기, 토요일 오전 텅 빈 카페를 바라보며 느낀 낯선 충만감, 그는 그때 자신이 ‘행피나의 1호 손님’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카페에 출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제3의 장소에 놀러 오는 기분이에요.”
행피나는 맛있는 커피와 빵을 핑계로 사람을 만나게 하고 하루를 쉬어가게 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커피 한잔 하자고 말할 때, 사실은 ‘한번 보자’라는 뜻이잖아요. 커피는 좋은 핑계일 뿐이에요. 저도 결국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이 자리를 지키는 거에요.” 그는 오늘도 카운터 뒤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사람과 정성, 그리고 시간이 차곡이 쌓인 행피나만의 온기가 손님들의 발걸음을 다시 이곳으로 이끈다.이정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