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호 2025년 1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서울대학교 종합화 50주년을 맞는 감회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완규
지난 10월 14일 서울대학교 종합화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1975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대학의 종합화를 이룬 것이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게 된 이유에는 흔히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서울시내 동숭동에 위치한 문리과대학 및 법과대학 학생들이 시내를 돌면서 펼치는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부 반대와 민주화 쟁취를 내건 과격한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아서 서울시내 질서의 혼란 상태가 계속된다는 점, 그리고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는 단과대학을 한군데로 모아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정책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서울시 근방을 탐색한 후, 남쪽 관악산 밑의 관악컨트리 클럽의 골프장을 서울대학교 부지로 결정하고 7억 원에 매수하였다고 한다.
캠퍼스의 종합화는 단지 단과대학을 한군데로 모았다는 의미보다 더 큰 의의가 있다. 여러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 내로 이전함으로서 획기적인 교육효과를 걷을 수 있다. 첫째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외에 인성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고 둘째, 공과대학 학생이 경영대학 개설 학과목을 이수하거나 농과대학 학생이 자연과학 대학의 기초과학 과목을 이수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등, 학생이 전공 외에 선호하는 학과목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일시에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종합화 후 서울대학교가 법인화 되었으나 대학운영에 필요한 재원확보가 부실하여 교육의 효과를 얻을 수 없어서 매년 발표되는 세계 대학 평가순위는 30위 이하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무척 안타깝다.
특히 최근 10개 지역에 서울대학교를 개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계가 있었다. 그 같은 발상보다는 그에 소요되는 예산의 일부라도 현재의 서울대학교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65세 정년제로 인하여 교수들은 정년 4, 5년 전부터 대학원학생을 받지 않으며 연구역량이 탁월한 교수도 연구용 기자재를 남겨 놓은 채 연구실을 떠난다. 정년 교수가 그동안 축적한 지식과 경륜을 활용할 기회를 제공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그간 쌓아 온 지식과 경륜은 그대로 사장되고 만다. 그러니 이 같은 인력의 낭비는 없다. 교수 시절 뛰어난 연구역량으로 괄목한 연구업적을 축적한 교수를 정년 규정에 따라 그대로 사퇴하게 하지 말고 이들을 ‘석좌교수’ 등 이름으로 임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이가 90이 넘더라도 연구실을 유지하며 대학원 학생 지도 및 연구활동을 수행할 제도를 마련하여야 한다. 또한 외국의 저명 과학자를 특채하여 연구실을 제공하여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대학원 학생 지도를 맡도록 함으로서 우리 젊은 학생의 연구역량을 축적하게 하여야 한다. 그동안 과학교육에 헌신해 온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은 이미 25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는데 우리는 한 사람도 없다. 그이유가 무엇인가’고 묻는 사람이 많다. 특히 근래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학에서 양성한 석사, 박사학위 취득자가 미국 등 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유출함으로써 경제발전의 기본인 과학기술경쟁력이 약화하여서 경제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으며 그간 이루어 놓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에서 후퇴할 조짐이 있다. 서울대학교가 양성한 석, 박사의 유출을 막을 뿐 아니라, 외국의 저명학자를 교수로 영입할 재원을 확보, 지원함으로써 ‘서울대학교의 위기’에서 벗어나 끝내는 ‘서울대학교의 세계화’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대학 평가 순위의 우위를 차지한 싱가포르 대학이나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등은 그 대학교 출신과 사회 유지가 대학의 인력양성 및 연구사업 지원을 위하여 크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들 대학이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한정된 정부예산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졸업생 그리고 유지들이 ‘서울대학교 후원회’를 구성하여 대학교의 교육 및 연구활동 지원을 위한 재원 조성에 노력하고 지원함으로써 우리 모교의 세계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1년 전인 1974년 2월, 나는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선배교수 혹은 원로교수 중에서 한 분이 맡아야 할 직책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인데 40대 초의 새파랗게 젊은 후배, 제자인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어 무척 부담스러웠다. 특히 미국 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의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67년 8월부터 2년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귀국할 때 인구협회가 제공한 연구비 15,000달러로 연구실을 꾸며서 대학원 학생 지도와 연구생활에 몰두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낼 때였다.
특히 1년 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계획이지만 부실한 기초과학의 연구용 및 교육용 시설의 보완이 매우 절실한 실정이었다. 나는 대학본부의 승인을 얻고, 미국 대사관 AID 담당관인 네이블(Neville)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교육차관금 제공 가능성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AID 측은 미국 대학의 교수 9명으로 구성된 차관타당성 조사단을 서울대학교로 파견하였고 서울대학교 측 타당성조사단장을 맡은 나와 같이 두 달 동안, 차관 타당성 여부를 조사한 후 타당성조사단은 양국 정부에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결국 양국 정부는 500만 달러를 지원하며 5개년에 걸쳐 차관사업을 수행하고 재원은 40년 후부터 3% 이자로 40년간에 걸쳐 갚아나가는 방안에 합의하였다. 500만 달러 중 절반인 250만 달러는 80명의 자연과학계 교수를 대상으로 하여, 각각 1년 혹은 2년간 미국 내 대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수행할 연구활동의 지원 재원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귀국 후에도 같은 과제로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미국 연구기관에서 사용하였던 연구용 기자재 구입비로 배정하는 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특히 영어에 능통한 물리학과 김제완 교수가 서울대학교 측 타당성 조사단 간사역을 맡아서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학교의 AID 교육차관 사업이 차관사업 중 가장 성공한 예로 평가되고 있다.
50년 전인 1975년 3월, 문리과대학이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3개 대학으로 분리되어 새로운 체제로 출범하게 되었고 나는 자연과학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3월 초, 나를 방문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분자생물학계의 거두, 오스틴 교수 내외분과 경주, 부산 지역을 여행 중, 호텔에 배달된 신문에 내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즉시 총장에게 학장 직 임명을 수용할 수 없으며 이를 취소하도록 요청하였다. 무급 조교를 쓰더라도 본인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학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본인의 뜻을 묻지도 않고 발령 낸 것, 그리고 학장 자리를 바라는 선배 교수 및 원로 교수의 반응이 어떨까를 예상한 나는 총장에게 학장 임명 재고를 요구한 것이다. 총장의 설명에 의하면 ’1975년 2월 28일, 서울대학교 측이 제의한 두 가지 안, 즉 문리과대학의 존속, 아니면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3개 대학으로의 분리의 두 가지 안 중, 오후 6시, 대통령이 3개 대학으로 분리하는 안을 결재하였고, 따라서 3월 1일부터 출범하게 될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 후보자로 나를 지명하였고 나를 찾았으나 연결되지 않아, 일단 발령 먼저 냈다‘고 하였다. 까마득한 후배요 제자인 내가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직을 맡은 것에 대하여서도 선배 교수, 원로 교수들이 불만이었는데, 더구나 그분들이 바랐던 학장직을 내가 맡았으니 불만이 어떠하였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총장에게 나에 대한 학장직 발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며 3월 학기 초, 대학으로 출근하지 않고 시내 한 호텔에 잠적하였다. 내가 묵은 호텔을 알게 된 서, 너 명의 젊은 교수가 나를 찾아와서 나를 도울 것이니 학장직을 맡도록 간청하였다. 결국 나는 학장실로 출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장으로 취임한 나는 대학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학과장 회의 때마다 학과장인 원로교수를 오시라, 가시라하기가 송구스러워서 원로교수의 학과장직을 해임하였고, 대신 다음 순위의 선배교수를 학과장으로 위촉하였다. 서, 너 명의 원로교수가 나를 찾아오셔서 ’이 사람아, 그 자리마저 뺏어!‘ 하며 나의 조치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셨다.
여러 단과대학에 기초과학 과목을 제공하여야 하지만 이를 담당할 교수 수가 부족하여 윤천주 총장에게 교수 증원을 요청하였다. 나의 요청을 받아드린 윤 총장은 자연과학대학에 신규교수 정원 30명을 배정하였다.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교수가 임의로 교수를 추천해 온 관례를 바꾸어 나는 교수공개채용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각종 신문 그리고 관련 학회지에 교수공채 광고를 냈다. 그 결과 미국, 유럽 등 명문대학에서 교수 혹은 연구 요원으로 활동 중인 학자 70여 명이 응모하였다. 대학 인사위원회에서 추천한 30명을 신임교수로 채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연과학대학 교수의 연구역량이 일시에 국제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는 교수회의에서 ’오늘부터 교수 여러분의 연구비를 학장인 제가 관리하겠다.‘ 며 저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동안 교수들이 직접 연구비를 집행함에 있어 여러 가지 구설수가 있었고 따라서 연구비 관리의 신빙성을 획득하여야 했다. 일부 원로교수는 ’나보고 준 연구비인데 왜 당신이 간섭이야!‘ 라며 역시 불만을 표시하였다. 나는 무슨 동 몇 번지 아무개에게 드린 연구비가 아니고 자연과학대학 교수 아무개에게 드린 연구비니 학장이 당연히 연구비를 관리하여야 한다며 연구비 집행에는 불편이 없도록 교수에게는 100만 원 통장을 만들어 드리고 영수증 제시 때마다 해당 금액을 채워드릴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교수들이 동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구비 집행에 대한 그간의 불신이 없어졌다. 이 같은 자연과학대학의 혁신이 다른 단과대학으로 파급되었고 끝내는 전국 대학교의 개혁계기가 된 것이다.
학장 임기 규정에 따르면 임기 2년이며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12월 말이 나의 학장직 임기가 끝나서 그간 소홀하였던 연구실 생활로 복귀하였다. 나는 새로운 연구과제 협의를 위하여 유럽의 친구를 만나고 귀국하였다. 바로 다음날 총장공관에서 열리는 신년 교례 모임에 참석하였고 서명원 부총장에게 다음 자연과학대학 학장이 누군가 고 물었다. 서 부총장은 대뜸 ‘누군 누구야, 당신이지’ 라고 하여 내가 3연임 학장이 된 것을 알았다. 서울대하교에서 3연임 학장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황하였으나 학장직 3연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79년 6월,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고병익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고, 내가 부총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총장직을 맡을 생각이 없는 나에게 고 총장은 교수직 사표를 내라고 하였다. 부총장직은 본직이어서 교수직을 겸할 수 없었다. 고 총장은 부총장직을 고사하겠다는 나를 대동하고 교육부를 찾아 박찬현 장관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부총장직 발령받고자 온 것이 아니고,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다.’ 라며 나는 그 이유를 댔다. 부총장직을 고사하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에 난감한 장관은 ‘이전의 부총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만 둘 이유가 무엇인가’고 나에게 물었다. ‘전임 부총장은 흔히 총장직을 승계하거나 또는 지방 국립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기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였지만, 50대 초인 나는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으로 복귀하여 65세 정년까지 학자로서 연구실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제자를 키우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라며 나의 심정을 밝혔다. 그리나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의견도 제시하였다. 즉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하여 부총장직도 학장직처럼 보직이 되도록 하여야 하다는 의견에 장관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 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고 국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10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인하여 국회는 법 처리 없이 해산하였다. 결국 나는 본직인 부총장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해 3월, 집권을 내건 전두환 장군이 출현함에 따라 그에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 연일 격렬한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를 이유로 정부는 고 총장과 부총장인 나를 모두 해임하였다. 결국 나는 실직자가 된 것이다.
두 달 후, 새로 취임한 권이혁 총장이 나에게 교수임명에 필요한 서류를 내라고 하였다. 나는 고 총장과 함께 아니면, 교수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권 총장은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자며 나의 교수 복귀를 권하였다. 결국 나는 1980년, 두 번째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명된 것이다. 고 총장은 한국정신문화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87년 8월, 내 연구실 대학원 학생들과 법주사 근처 숙소에서 학술행사를 하고 있는 나를 교육부 서명원 장관이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장관을 만나자 곧바로 ‘총장 하시오‘ 라며 나를 총장으로 임명한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임명 총장은 내가 끝이요, 앞으로는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천된 후보자 3명을 정부에 제청하기로 하겠다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총장으로 취임한 나는 대학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우선 그간 제명된 1300명 학생을 모두 복학시켰다. 시위에 가담하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 이름을 받은 총장은 이들이 학칙 중 ’정치활동 금지‘ 조항에 저촉된다며 바로 제명처분을 하였다. 당시의 김경동 기획실장, 이현구 교무처장, 민병수 학생처장 등 대학교 간부와 협의를 거처 나는 학칙 중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 개정안을 교육부에 제출하였다. 교육부는 3개월이 지나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학칙 개정안을 승인할 경우 서울대 캠퍼스는 연일 학생들의 시위로 소란할 것이고, 이 같은 소요가 전국 대학으로 파급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교육부 서명원 장관에게 학칙 개정안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총장직을 사퇴할 것임을 밝혔다. 결국 서 장관은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처음 교수들이 마련한 자율학칙이며 그 정신을 존중하는 뜻에서 학칙 승인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음 장관에게 미루지 않고 내가 직접 승인하고 장관직을 떠날 것‘이라며 서울대학교의 자율학칙(안)을 결제하고 바로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다른 여러 부처의 염려와는 달리 새로운 학칙의 승인 후 대학은 오히려 조용했다. 학생징계권을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의 총장직의 성공적 수행은 바로 처, 실장 10여 명의 헌신적 협력이 있어 가능하였다. 1991년 총장임기를 마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교무처장인 이현구 교수, 기획실장인 김경동 교수 및 정영일 교수, 연구처장인 권숙일 교수와 전 기획실장 서정헌 교수 등 전 간부들이 본부 4층에 사무실이 있었고, 그 연유로 소위 ‘4층회’ 이름으로 1년에 서너 번, 호암교수회관에서 오찬을 나누며 환담을 나눈다. 이 모임은 이미 40년이 흘렀다. 다만 부총장인 김종운 교수와 김영국 교수 그리고 학생처장으로 수고가 많았던 민병수 교수가 일찍 타계한 것이 아쉽다.
서울대학교에는 총장이 이사장이고 교무처장이 상임이사인 학술연구재단과 학생처장이 상임이사인 장학회재단이 있었다. 이 두 재단은 그간 예금한 은행 이자로 사업을 수행하였다. 은행 이자가 사업의 재원이기 때문에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다. 나는 두 재단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재단‘으로 발족하기로 하고,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를 재단 상임이사로 위촉하였다. 감독청은 재단 이름에 구체적인 사업을 표시하여야 한다며 ’발전기금재단‘ 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발전‘이라는 용어만큼 더 구체적인 사업 이름이 없다며 계속 그들을 설득하였고, 결국 3개월 후 관련 부처는 ’발전기금재단‘ 이름의 재단 수립을 승인하였다. 조동성 상임이사의 활발한 모금운동으로 기금은 일시에 크게 확장하였다. 나도 5년간 봉사한 인촌상위원회 위원장으로 받은 5천만 원을 2012년 에 재단에 기탁하였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달 10만원을 후원금으로 입금하고 있다. 오늘날, 이 재단은 다양한 사업으로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 등 외국 대학총장이 서울대학교 총장실로 찾아와 학술교류협정을 제의하였다. 나는 이 제안을 선뜻 수용할 수가 없었다. 첫째, 우리 대학의 교수 5명을 보내면 그 쪽 대학의 교수 3명을 받아야 하는데, 재울 곳도, 식사할 곳도 그리고 회의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삼성 이건희 회장 측과 협의하였다. 초빙교수가 숙박할 방 100개와, 가족을 동반한 초빙교수가 숙박할 방 100개의 숙박시설, 그리고 이들이 회의하고 식사할 건물 한 채 등, 3개의 건물을 지어 줄 것을 제의하였고, 삼성 측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 부지에 3개의 건물을 신축하여 1990년 3월, 삼성 설립자 이병철 회장의 아호인 ’호암‘의 이름을 딴 ’호암교수회관‘으로 개관하였고 회관 옆에 기념식수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교육부 정원식 장관, 총장인 나 그리고 삼성 이건회 회장의 이름을 새긴 기념표석을 남겼다. 삼성 측은 신라호텔 지배인을 파견하여 2년 동안 호암교수회관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수회관은 일류 호텔 수준의 숙박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개관 후 30여 년이 되는 호암교수회관은 국내외에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호암교수회관의 숙박시설을 이용하려면 최소한 2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총장으로서 호암교수회관을 개관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용한 가운데 4년 임기의 총장직을 마쳤다. 대학은 학문의 자유, 자율적 운영 그리고 지성인의 집단으로서 사회, 정치권에 대한 비판의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를 선도하는 지성인의 집단체로서 앞으로도 그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나라 발전에 기여하여야 한다.
서울대학교 종합화 50주년을 맞아 서울대학교와 나의 끈끈한 인연을 되새겨 보았다. 아직도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에 위치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실로 출근하고 있으니, 1946년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나처럼 서울대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은 선, 후배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작년 10월, 서울대학교 개교 기념식 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그간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임원으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시상 통지를 받고 무척 민망하여 사양했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에게는 큰 보람이다. 1957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 이후 정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학생과장, 이학부장, 학장, 부총장 그리고 총장으로 봉사하며 보내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대학발전에 힘을 보태 온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서울대학교가 우리 나라 역사에 빛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관으로 생각한다. 서울대학교는 앞으로 50년을 보내면서 세계에 우뚝 선 선도적 대학으로 부상하기를 갈망한다.
캠퍼스의 종합화는 단지 단과대학을 한군데로 모았다는 의미보다 더 큰 의의가 있다. 여러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 내로 이전함으로서 획기적인 교육효과를 걷을 수 있다. 첫째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외에 인성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고 둘째, 공과대학 학생이 경영대학 개설 학과목을 이수하거나 농과대학 학생이 자연과학 대학의 기초과학 과목을 이수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등, 학생이 전공 외에 선호하는 학과목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일시에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종합화 후 서울대학교가 법인화 되었으나 대학운영에 필요한 재원확보가 부실하여 교육의 효과를 얻을 수 없어서 매년 발표되는 세계 대학 평가순위는 30위 이하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무척 안타깝다.
특히 최근 10개 지역에 서울대학교를 개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계가 있었다. 그 같은 발상보다는 그에 소요되는 예산의 일부라도 현재의 서울대학교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65세 정년제로 인하여 교수들은 정년 4, 5년 전부터 대학원학생을 받지 않으며 연구역량이 탁월한 교수도 연구용 기자재를 남겨 놓은 채 연구실을 떠난다. 정년 교수가 그동안 축적한 지식과 경륜을 활용할 기회를 제공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그간 쌓아 온 지식과 경륜은 그대로 사장되고 만다. 그러니 이 같은 인력의 낭비는 없다. 교수 시절 뛰어난 연구역량으로 괄목한 연구업적을 축적한 교수를 정년 규정에 따라 그대로 사퇴하게 하지 말고 이들을 ‘석좌교수’ 등 이름으로 임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이가 90이 넘더라도 연구실을 유지하며 대학원 학생 지도 및 연구활동을 수행할 제도를 마련하여야 한다. 또한 외국의 저명 과학자를 특채하여 연구실을 제공하여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대학원 학생 지도를 맡도록 함으로서 우리 젊은 학생의 연구역량을 축적하게 하여야 한다. 그동안 과학교육에 헌신해 온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은 이미 25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는데 우리는 한 사람도 없다. 그이유가 무엇인가’고 묻는 사람이 많다. 특히 근래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학에서 양성한 석사, 박사학위 취득자가 미국 등 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유출함으로써 경제발전의 기본인 과학기술경쟁력이 약화하여서 경제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으며 그간 이루어 놓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에서 후퇴할 조짐이 있다. 서울대학교가 양성한 석, 박사의 유출을 막을 뿐 아니라, 외국의 저명학자를 교수로 영입할 재원을 확보, 지원함으로써 ‘서울대학교의 위기’에서 벗어나 끝내는 ‘서울대학교의 세계화’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대학 평가 순위의 우위를 차지한 싱가포르 대학이나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등은 그 대학교 출신과 사회 유지가 대학의 인력양성 및 연구사업 지원을 위하여 크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들 대학이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한정된 정부예산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졸업생 그리고 유지들이 ‘서울대학교 후원회’를 구성하여 대학교의 교육 및 연구활동 지원을 위한 재원 조성에 노력하고 지원함으로써 우리 모교의 세계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1년 전인 1974년 2월, 나는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선배교수 혹은 원로교수 중에서 한 분이 맡아야 할 직책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인데 40대 초의 새파랗게 젊은 후배, 제자인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어 무척 부담스러웠다. 특히 미국 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의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67년 8월부터 2년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귀국할 때 인구협회가 제공한 연구비 15,000달러로 연구실을 꾸며서 대학원 학생 지도와 연구생활에 몰두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낼 때였다.
특히 1년 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계획이지만 부실한 기초과학의 연구용 및 교육용 시설의 보완이 매우 절실한 실정이었다. 나는 대학본부의 승인을 얻고, 미국 대사관 AID 담당관인 네이블(Neville)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교육차관금 제공 가능성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AID 측은 미국 대학의 교수 9명으로 구성된 차관타당성 조사단을 서울대학교로 파견하였고 서울대학교 측 타당성조사단장을 맡은 나와 같이 두 달 동안, 차관 타당성 여부를 조사한 후 타당성조사단은 양국 정부에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결국 양국 정부는 500만 달러를 지원하며 5개년에 걸쳐 차관사업을 수행하고 재원은 40년 후부터 3% 이자로 40년간에 걸쳐 갚아나가는 방안에 합의하였다. 500만 달러 중 절반인 250만 달러는 80명의 자연과학계 교수를 대상으로 하여, 각각 1년 혹은 2년간 미국 내 대학 혹은 연구기관에서 수행할 연구활동의 지원 재원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귀국 후에도 같은 과제로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미국 연구기관에서 사용하였던 연구용 기자재 구입비로 배정하는 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특히 영어에 능통한 물리학과 김제완 교수가 서울대학교 측 타당성 조사단 간사역을 맡아서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학교의 AID 교육차관 사업이 차관사업 중 가장 성공한 예로 평가되고 있다.
50년 전인 1975년 3월, 문리과대학이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3개 대학으로 분리되어 새로운 체제로 출범하게 되었고 나는 자연과학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3월 초, 나를 방문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분자생물학계의 거두, 오스틴 교수 내외분과 경주, 부산 지역을 여행 중, 호텔에 배달된 신문에 내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즉시 총장에게 학장 직 임명을 수용할 수 없으며 이를 취소하도록 요청하였다. 무급 조교를 쓰더라도 본인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학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본인의 뜻을 묻지도 않고 발령 낸 것, 그리고 학장 자리를 바라는 선배 교수 및 원로 교수의 반응이 어떨까를 예상한 나는 총장에게 학장 임명 재고를 요구한 것이다. 총장의 설명에 의하면 ’1975년 2월 28일, 서울대학교 측이 제의한 두 가지 안, 즉 문리과대학의 존속, 아니면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3개 대학으로의 분리의 두 가지 안 중, 오후 6시, 대통령이 3개 대학으로 분리하는 안을 결재하였고, 따라서 3월 1일부터 출범하게 될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 후보자로 나를 지명하였고 나를 찾았으나 연결되지 않아, 일단 발령 먼저 냈다‘고 하였다. 까마득한 후배요 제자인 내가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직을 맡은 것에 대하여서도 선배 교수, 원로 교수들이 불만이었는데, 더구나 그분들이 바랐던 학장직을 내가 맡았으니 불만이 어떠하였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총장에게 나에 대한 학장직 발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며 3월 학기 초, 대학으로 출근하지 않고 시내 한 호텔에 잠적하였다. 내가 묵은 호텔을 알게 된 서, 너 명의 젊은 교수가 나를 찾아와서 나를 도울 것이니 학장직을 맡도록 간청하였다. 결국 나는 학장실로 출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장으로 취임한 나는 대학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학과장 회의 때마다 학과장인 원로교수를 오시라, 가시라하기가 송구스러워서 원로교수의 학과장직을 해임하였고, 대신 다음 순위의 선배교수를 학과장으로 위촉하였다. 서, 너 명의 원로교수가 나를 찾아오셔서 ’이 사람아, 그 자리마저 뺏어!‘ 하며 나의 조치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셨다.
여러 단과대학에 기초과학 과목을 제공하여야 하지만 이를 담당할 교수 수가 부족하여 윤천주 총장에게 교수 증원을 요청하였다. 나의 요청을 받아드린 윤 총장은 자연과학대학에 신규교수 정원 30명을 배정하였다.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교수가 임의로 교수를 추천해 온 관례를 바꾸어 나는 교수공개채용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각종 신문 그리고 관련 학회지에 교수공채 광고를 냈다. 그 결과 미국, 유럽 등 명문대학에서 교수 혹은 연구 요원으로 활동 중인 학자 70여 명이 응모하였다. 대학 인사위원회에서 추천한 30명을 신임교수로 채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연과학대학 교수의 연구역량이 일시에 국제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는 교수회의에서 ’오늘부터 교수 여러분의 연구비를 학장인 제가 관리하겠다.‘ 며 저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동안 교수들이 직접 연구비를 집행함에 있어 여러 가지 구설수가 있었고 따라서 연구비 관리의 신빙성을 획득하여야 했다. 일부 원로교수는 ’나보고 준 연구비인데 왜 당신이 간섭이야!‘ 라며 역시 불만을 표시하였다. 나는 무슨 동 몇 번지 아무개에게 드린 연구비가 아니고 자연과학대학 교수 아무개에게 드린 연구비니 학장이 당연히 연구비를 관리하여야 한다며 연구비 집행에는 불편이 없도록 교수에게는 100만 원 통장을 만들어 드리고 영수증 제시 때마다 해당 금액을 채워드릴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교수들이 동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구비 집행에 대한 그간의 불신이 없어졌다. 이 같은 자연과학대학의 혁신이 다른 단과대학으로 파급되었고 끝내는 전국 대학교의 개혁계기가 된 것이다.
학장 임기 규정에 따르면 임기 2년이며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12월 말이 나의 학장직 임기가 끝나서 그간 소홀하였던 연구실 생활로 복귀하였다. 나는 새로운 연구과제 협의를 위하여 유럽의 친구를 만나고 귀국하였다. 바로 다음날 총장공관에서 열리는 신년 교례 모임에 참석하였고 서명원 부총장에게 다음 자연과학대학 학장이 누군가 고 물었다. 서 부총장은 대뜸 ‘누군 누구야, 당신이지’ 라고 하여 내가 3연임 학장이 된 것을 알았다. 서울대하교에서 3연임 학장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황하였으나 학장직 3연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79년 6월,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고병익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고, 내가 부총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총장직을 맡을 생각이 없는 나에게 고 총장은 교수직 사표를 내라고 하였다. 부총장직은 본직이어서 교수직을 겸할 수 없었다. 고 총장은 부총장직을 고사하겠다는 나를 대동하고 교육부를 찾아 박찬현 장관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부총장직 발령받고자 온 것이 아니고,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다.’ 라며 나는 그 이유를 댔다. 부총장직을 고사하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에 난감한 장관은 ‘이전의 부총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만 둘 이유가 무엇인가’고 나에게 물었다. ‘전임 부총장은 흔히 총장직을 승계하거나 또는 지방 국립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기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였지만, 50대 초인 나는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으로 복귀하여 65세 정년까지 학자로서 연구실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제자를 키우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라며 나의 심정을 밝혔다. 그리나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의견도 제시하였다. 즉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하여 부총장직도 학장직처럼 보직이 되도록 하여야 하다는 의견에 장관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 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고 국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10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인하여 국회는 법 처리 없이 해산하였다. 결국 나는 본직인 부총장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해 3월, 집권을 내건 전두환 장군이 출현함에 따라 그에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 연일 격렬한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를 이유로 정부는 고 총장과 부총장인 나를 모두 해임하였다. 결국 나는 실직자가 된 것이다.
두 달 후, 새로 취임한 권이혁 총장이 나에게 교수임명에 필요한 서류를 내라고 하였다. 나는 고 총장과 함께 아니면, 교수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권 총장은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자며 나의 교수 복귀를 권하였다. 결국 나는 1980년, 두 번째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명된 것이다. 고 총장은 한국정신문화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87년 8월, 내 연구실 대학원 학생들과 법주사 근처 숙소에서 학술행사를 하고 있는 나를 교육부 서명원 장관이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장관을 만나자 곧바로 ‘총장 하시오‘ 라며 나를 총장으로 임명한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임명 총장은 내가 끝이요, 앞으로는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천된 후보자 3명을 정부에 제청하기로 하겠다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총장으로 취임한 나는 대학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우선 그간 제명된 1300명 학생을 모두 복학시켰다. 시위에 가담하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 이름을 받은 총장은 이들이 학칙 중 ’정치활동 금지‘ 조항에 저촉된다며 바로 제명처분을 하였다. 당시의 김경동 기획실장, 이현구 교무처장, 민병수 학생처장 등 대학교 간부와 협의를 거처 나는 학칙 중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 개정안을 교육부에 제출하였다. 교육부는 3개월이 지나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학칙 개정안을 승인할 경우 서울대 캠퍼스는 연일 학생들의 시위로 소란할 것이고, 이 같은 소요가 전국 대학으로 파급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교육부 서명원 장관에게 학칙 개정안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총장직을 사퇴할 것임을 밝혔다. 결국 서 장관은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처음 교수들이 마련한 자율학칙이며 그 정신을 존중하는 뜻에서 학칙 승인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음 장관에게 미루지 않고 내가 직접 승인하고 장관직을 떠날 것‘이라며 서울대학교의 자율학칙(안)을 결제하고 바로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다른 여러 부처의 염려와는 달리 새로운 학칙의 승인 후 대학은 오히려 조용했다. 학생징계권을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의 총장직의 성공적 수행은 바로 처, 실장 10여 명의 헌신적 협력이 있어 가능하였다. 1991년 총장임기를 마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교무처장인 이현구 교수, 기획실장인 김경동 교수 및 정영일 교수, 연구처장인 권숙일 교수와 전 기획실장 서정헌 교수 등 전 간부들이 본부 4층에 사무실이 있었고, 그 연유로 소위 ‘4층회’ 이름으로 1년에 서너 번, 호암교수회관에서 오찬을 나누며 환담을 나눈다. 이 모임은 이미 40년이 흘렀다. 다만 부총장인 김종운 교수와 김영국 교수 그리고 학생처장으로 수고가 많았던 민병수 교수가 일찍 타계한 것이 아쉽다.
서울대학교에는 총장이 이사장이고 교무처장이 상임이사인 학술연구재단과 학생처장이 상임이사인 장학회재단이 있었다. 이 두 재단은 그간 예금한 은행 이자로 사업을 수행하였다. 은행 이자가 사업의 재원이기 때문에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다. 나는 두 재단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재단‘으로 발족하기로 하고,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를 재단 상임이사로 위촉하였다. 감독청은 재단 이름에 구체적인 사업을 표시하여야 한다며 ’발전기금재단‘ 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발전‘이라는 용어만큼 더 구체적인 사업 이름이 없다며 계속 그들을 설득하였고, 결국 3개월 후 관련 부처는 ’발전기금재단‘ 이름의 재단 수립을 승인하였다. 조동성 상임이사의 활발한 모금운동으로 기금은 일시에 크게 확장하였다. 나도 5년간 봉사한 인촌상위원회 위원장으로 받은 5천만 원을 2012년 에 재단에 기탁하였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달 10만원을 후원금으로 입금하고 있다. 오늘날, 이 재단은 다양한 사업으로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 등 외국 대학총장이 서울대학교 총장실로 찾아와 학술교류협정을 제의하였다. 나는 이 제안을 선뜻 수용할 수가 없었다. 첫째, 우리 대학의 교수 5명을 보내면 그 쪽 대학의 교수 3명을 받아야 하는데, 재울 곳도, 식사할 곳도 그리고 회의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삼성 이건희 회장 측과 협의하였다. 초빙교수가 숙박할 방 100개와, 가족을 동반한 초빙교수가 숙박할 방 100개의 숙박시설, 그리고 이들이 회의하고 식사할 건물 한 채 등, 3개의 건물을 지어 줄 것을 제의하였고, 삼성 측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 부지에 3개의 건물을 신축하여 1990년 3월, 삼성 설립자 이병철 회장의 아호인 ’호암‘의 이름을 딴 ’호암교수회관‘으로 개관하였고 회관 옆에 기념식수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교육부 정원식 장관, 총장인 나 그리고 삼성 이건회 회장의 이름을 새긴 기념표석을 남겼다. 삼성 측은 신라호텔 지배인을 파견하여 2년 동안 호암교수회관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수회관은 일류 호텔 수준의 숙박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개관 후 30여 년이 되는 호암교수회관은 국내외에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호암교수회관의 숙박시설을 이용하려면 최소한 2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총장으로서 호암교수회관을 개관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용한 가운데 4년 임기의 총장직을 마쳤다. 대학은 학문의 자유, 자율적 운영 그리고 지성인의 집단으로서 사회, 정치권에 대한 비판의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를 선도하는 지성인의 집단체로서 앞으로도 그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나라 발전에 기여하여야 한다.
서울대학교 종합화 50주년을 맞아 서울대학교와 나의 끈끈한 인연을 되새겨 보았다. 아직도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에 위치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실로 출근하고 있으니, 1946년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나처럼 서울대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은 선, 후배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작년 10월, 서울대학교 개교 기념식 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그간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임원으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시상 통지를 받고 무척 민망하여 사양했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에게는 큰 보람이다. 1957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 이후 정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학생과장, 이학부장, 학장, 부총장 그리고 총장으로 봉사하며 보내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대학발전에 힘을 보태 온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서울대학교가 우리 나라 역사에 빛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관으로 생각한다. 서울대학교는 앞으로 50년을 보내면서 세계에 우뚝 선 선도적 대학으로 부상하기를 갈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