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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호 2025년 11월] 문화 나의 취미

공간 꽉 채운 오디오 장비…“LP 바늘의 노이즈까지 사랑합니다”

공간 꽉 채운 오디오 장비…“LP 바늘의 노이즈까지 사랑합니다”


박준근 (농공62) 동문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 릴 테이프, 빈티지 스피커 등으로 채워진 거실. 수십 년간 수집한 오디오 장비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조화를 이룬다.

재즈 LP판 등 2만여 장 보유
제니스 라디오와 첫 만남 강렬

턴테이블의 바늘이 홈을 타고 흐르자, 미세한 잡음이 공기 속에 반짝였다. 진공관의 불빛이 켜지고, 스피커가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보이는’ 공간, 용인의 한 거실. 이곳에서 2만여 장의 LP와 수십 종의 오디오를 돌보는 박준근(농공62) 동문은 말한다. “오디오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닙니다. 손끝과 눈,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죠.”

‘나의 취미’ 코너에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동문들의 제보가 이어진다. 이번엔 음악을 즐기는 박준근 동문이 자신만의 소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단풍이 익어가는 10월 마지막 주, 박 동문의 용인 자택에서 그가 만지는 소리를 듣고 느껴봤다.

그의 오디오 철학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북에서 여섯 가족이 함께 남하해 힘겹게 정착하던 시절, 먹을 것이 모자라 방 하나를 나누어 써야 했다. 검소함이 몸에 밴 것은 그때부터였다. 교직에 있던 아버지가 월급을 모아 사주었던 미국산 제니스(Zenith) 라디오가 그의 첫 오디오였다. “그때 처음 들은 단파방송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내 방에 들어온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그 작은 라디오는 훗날 그의 평생 취미이자 철학의 원점이 되었다.

거실 한가득 진공관 앰프가 줄지어 있고, 방에는 벽면을 따라 LP가 빼곡히 꽂혀 있다. 양옆에는 Tannoy Westminster Royal 스피커가 서 있고, 중앙에는 Thorens Prestige 벨트형 턴테이블이 자리한다.

앰프는 McIntosh 275, 그리고 마란츠 브랜드의 창립자 솔 마란츠(Saul Marantz)가 생전에 직접 설계·제작한 진공관 앰프와 튜너 1번부터 10번까지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직접 제작한 수납장에 2만여 장의 LP를 정리해 둔 오디오룸.

세월의 흔적이 깃든 기계들은 지금도 완벽히 작동하며, 그 소리를 통해 여전히 살아 있다. “소스가 움직이고, 메인 앰프를 거쳐 모노 채널로 나뉘는 과정, 소리를 내는 장비들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즐겁습니다. 또 손으로 직접 조절하며 변화를 느끼는 재미도 크죠.” 그에게 오디오는 듣는 것 이상의 ‘오감의 취미’다.

“기계만 만지는 사람, 혹은 음악만 듣는 사람은 반쪽 재미일 수 있습니다. 음악을 재생하는 기계를 조작하고, 살아있는 음악을 끌어내어 듣는 게 진짜 감동이죠.” 그가 오디오를 대하는 태도는 장비 수집이 아니라 소리를 복원하는 실험에 가깝다. 진공관의 온도나 전압의 미세한 차이, 케이블 재질의 변화에 따라 공간의 결이 달라진다. 그는 그 차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며, 한 곡이 완성되는 과정을 즐긴다.

음악 취향은 폭넓다. 클래식과 재즈, 블루스, 1960~70년대 록과 포크가 장르별로 정리되어 있다. “음악을 들으면 그 시대의 온도, 사람들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장르는 다르지만 결국 다 삶의 소리예요.”

박 동문에게 음악은 하루를 견디게 하는 질서이자 쉼표였다. 현대건설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국내외 현장을 누비던 시절에도, 가장 먼저 챙긴 것은 휴대용 턴테이블이었다. “음악은 내 수호신이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한 곡만 제대로 들으면 마음이 정리됐어요.” 그가 LP를 고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LP는 바늘이 홈을 타며 얻는 미세한 정보가 있습니다. 노이즈조차 자연스러워요. 반면 CD는 너무 깨끗하고 일정하죠. 편하긴 하지만, 오래 들으면 피로합니다. 인간의 귀는 완벽보다 결을 좋아하거든요.”

박 동문은 아날로그의 불완전함을 ‘자연스러움의 미학’으로 여긴다. 디지털로 대체되는 세상을 이야기하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요즘은 모든 게 편리하죠. 하지만 단절된 편리함만 취하다 보면 자연의 소리를 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편린을 전부라고 착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가끔 돌아봐야 합니다.”

진공관의 불빛 아래서 음악을 보고, 만지고, 느끼며 사는 사람. 그에게 아날로그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되찾는 장치다. 오늘도 그의 공간에는 음악이 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송해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