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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호 2025년 1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혐오 댓글 달지 않는 것, 그런 댓글에 비추천도 공익 활동”

“혐오 댓글 달지 않는 것, 그런 댓글에 비추천도 공익 활동”


김재왕 (자연과학97)
서울대 공익법률센터 임상교수

국내 1호 시각장애인 변호사
20대 시력 잃고 생물학도서 변신

“살다 보면 누구나 기능을 잃습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김재왕(자연과학97·사진) 교수의 얼굴에는 담담함이 묻어 있었다. 20대 후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던 시절의 불안과 막막함을 지나 지금 그는 모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사람을 위한 법’을 가르치고 있다. 대한민국 첫 시각장애인 변호사로서, 그리고 공익인권의 현장을 걸어온 법조인으로서 그는 “공익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이라고 말한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사람을 위한 법의 길을 이어가는 김재왕 교수를 임상법률센터에서 만나, 그의 삶과 법을 향한 생각을 들어봤다.

그는 처음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놀랐죠. 진짜 이렇게 안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매일 조금씩 시야가 좁아지는 과정, 그는 하루하루 자신의 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느린 변화 속에서 그는 서서히 깨달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제게 도움이 돼요. 예전엔 두려움이 앞섰다면 이제는 그냥 ‘이런 거구나’ 하게 되죠. 그래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요.”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기억을 회상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아버지가 점점 쇠약해지시는 걸 보며,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냥 같이 밥 먹는 일, 대화하는 시간이 정말 귀하게 느껴졌죠.”

모교 자연과학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던 그는, 법학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었다. 그러나 시각장애를 가진 후 복지관에서 ‘동료 상담’을 받으며 마음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경험이 인권 분야로의 첫걸음이 됐다.

“그때 저한테 상담이 정말 큰 힘이 됐어요.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후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다가, 인연처럼 로스쿨 제도의 신설 소식을 들었다. “법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지원할 수 있고, 장애인 특별전형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인권위에서 일한 경험도 있었으니까, ‘한번 해볼까’ 싶었죠.” 그의 선택은 ‘도전’이라기보다 ‘그때 가능한 삶을 선택한 결과’였다. “그냥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한 거예요.” 그렇게 그는 대한민국 첫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됐다.

법조계에 입문하면서 그는 공부와 실무 모두에서 ‘듣는 법’을 익혔다. 시각 대신 청각으로 교재를 듣고, 음성 프로그램으로 문서를 읽었다. “안 보이니까 들을 수밖에 없었죠. 그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니까요.” 그는 늘 ‘함께’ 일했다. “사건을 혼자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공동대리인도 있고, 근로지원인이 도와줄 때도 있고, 급할 땐 가족의 도움도 받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죠.” 그는 잠시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사실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예요.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을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공익의 길로 들어섰다. “제가 장애인 당사자니까, 이쪽 일을 하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 또 일반 로펌에서는 시각장애인 변호사를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요.” 그의 말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단한 현실감이 있었다. “그냥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거예요.”

그는 수많은 공익소송을 맡으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싸웠다. 그중에서도 ‘에버랜드 시각장애인 차별 사건’은 그를 깊이 흔든 사건이었다. “상대방은 시각장애인은 위험하니까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다고 주장했어요. 논리적으로는 반박이 가능했지만, 감정적으로 참 힘들었어요. 재판부도 때로는 그런 논리에 동조하곤 했고요.” 그에게 그것은 “장애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의 불신”이었다. “결국 타인의 걱정이 누군가의 선택을 막는 거예요. 그게 참 슬펐어요.”

그는 공익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인간의 존엄. 그게 공익의 본질이다”라고 짧게 답했다. “사람들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봐요. ‘몸이 불편하니까 못할거야’라고 하죠. 그런데 사실은 사회가 준비되지 않아서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도나 환경, 보조기기, 지원 체계가 있으면 할 수 있죠. 결국 장애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예요.” 그는 “사람들이 ‘못한다’에서 ‘무엇이 필요할까’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며, “그게 인식의 전환이고, 진짜 포용”이라고 말했다.

2023년 3월, 그는 ‘희망을만드는법’을 떠나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의 임상 교수로 부임했다. 실제 사건을 학생들과 함께 맡아 진행하며, 법을 ‘살아있는 현실’로 가르친다. 의대의 임상실습처럼, 학생들이 진짜 사건을 경험하게 한다. “저도 여전히 변호사로 일하면서 학생들과 사건을 같이 하죠. 젊은 사람들과 일하면 저도 배우는 게 많아요. 그들의 에너지도 받게 되고요.”

그는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에서 진행 중인 ‘예비법률가학교’ 프로그램을 가장 의미 있는 활동으로 꼽았다. “학생들에게 공익 현장을 경험할 수 있게 연결해 주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며 공익의 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망설임 없는 조언을 건넸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그거 빼고는 다 좋아요. 보람 있고 재미있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하고 싶다면 한번 저질러보세요.”

그는 사회가 경쟁과 속도로만 움직이는 현실을 우려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너무 치열하게 살아요. 불안하니까 계속 달리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살아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조금 덜 치열해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해요.” 그는 특히 “빨리 갈 수 없는 사람들 ‘장애인, 여성, 노인’과 함께 가는 사회가 진짜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가 결국 모두에게 좋은 사회예요.”

인터뷰의 끝에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공익단체들은 늘 지원이 부족해요. 마음이 닿는 곳이 있다면 후원도 좋고, 작은 참여도 좋아요. 혐오 댓글을 달지 않는 것, 그런 댓글에 ‘비추천’을 누르는 것도 공익이에요. 그런 사소한 실천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는 사람, 그의 법은 판결문 속의 문장이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묻는 철학에 가깝다. 오늘도 그는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우리 사회의 ‘함께 걷는 길’을 비추고 있다. 이정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