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호 2025년 1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등산 장학금부터 펀드 기부까지 …101억원 사회 환원
등산 장학금부터 펀드 기부까지 …101억원 사회 환원

권준하 (경제63) 동문
등산 장학금의 뜻을 남긴 아버지를 기억하며, 권준하 동문이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부친 호 붙여 미산 장학금 조성
근검절약 정신 이어받아 부 일궈
“등산 장학금에 1457명이 몰렸대요. 나도, 학교도 깜짝 놀랐죠.”
권준하(경제63·사진) 동문의 입꼬리가 환히 올라갔다. 서울대 학생이 산에 오르면 장학금을 받는 ‘미산(彌山) 등산 장학금’. 이번 학기 처음 도입된 이 장학금은 올해 말 까지‘100대 명산 6회 정상 인증 시 최대 70만원 지급’이라는 조건에 신청자가 쇄도하자, 권 동문과 학생처는 당초 70명이었던 선발 인원을 300명 이상으로 확대했다. 성적도 소득도 관계 없이 ‘산에만 오르면 돈을 준다’는 이색 제안의 배경이 궁금해, 서초동 자택에서 권준하 동문을 직접 만났다.
“서울대 학생들, 책상 앞에서만 너무 오래 싸웠잖아요. 자연을 걸으며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권 동문은 서울대에 대한 장학 기부를 비롯해, 수많은 나눔의 여정을 걸어오며 언제나 서재에 걸린 부모님의 사진 앞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 호가 미산이에요. 서울대에 만든 ‘미산 장학금’도, 사랑의 열매에 만든 ‘미산 기금’도 다 아버지께 올리는 마음으로 한 겁니다. 서재에 사진을 걸어두고, 매일 기도합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고, 제가 어떻게 살고 있다고’ 마치 살아 계신 듯 말씀드리죠.”
부친 권 직 선생은 익산에서 세무서장을 지내며 근검절약과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했고, 대지주였던 조부는 학교 설립에 기부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했다. 권 동문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이 가르침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우리 집안은 유복했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근검절약’과 ‘참으면 덕이 된다(忍之爲德)’를 강조하셨어요. 시장에서 상가 월세를 받으시면서도 주변보다 절반으로 받으셨죠.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삶, 저도 그걸 따라가려 합니다.”
권 동문은 단순히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기부를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국내 최초로 ‘펀드 기부’를 개발해 원금을 보존하면서 수익금으로 장학금과 복지사업을 지속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서울대 상대에 5억원을 기부했는데, 장학금으로 7500만원을 지급하고도 현재 잔액이 11억원이 넘었습니다. 펀드 수익률로 따지면 150~160%쯤 되지요. 좋은 일을 하니 하늘도 도와주더군요. 매일 아침, 내 펀드보다 학교 펀드 수익률을 먼저 확인하는게 더 기쁩니다.”
기부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3년 사랑의 열매에 2억원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원광대병원, 사랑의 달팽이 보청기 지원, 여성 가장 난방기기, 연탄 나눔, 장학기금 조성 등 그가 여러 기관과 단체에 기부한 누적 원금은 101억원을 넘긴다. 수익금까지 포함하면 총 기부액은 훨씬 크다.
이 모든 선택의 뿌리는 ‘산’에 있다. 젊은 시절 매주 1000m 고지를 오르며 몸과 마음을 다잡던 권 동문은, 함께 산에 다니던 친구의 권유로 등산을 시작했다. “그 친구가 제 인생을 바꿨어요. 고인이 되었지만, 늘 고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씨앗 하나씩을 심는 것, 그게 제 꿈입니다.” 그 씨앗은 점점 자라나고 있다. 권 동문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부모와 오랜만에 손잡고 산에 올랐다는 학생, 형제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는 학생, 인생의 고비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들. 그런 편지를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이 옵니다.”
기쁨은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손자·손녀들이 ‘할아버지처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손주들이 주말마다 등산을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더군요. 자기도 장학금 받아야겠다며 웃으며 얘기하는데, 그게 제게는 세상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고향 익산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중앙시장 옆 창인동에서 자란 그는, 가족과 함께 대청천에서 수영하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기쁨을 돌려주고 싶어요.” 실제로 그는 고향 지역의 보청기 무상 지원, 장학금, 연탄 나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익산에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있다.
권 동문은 지금도 매일 펀드 공부를 한다. 강남의 증권사 수십 곳과 거래하며 100여 개 펀드를 운용 중이다. “좋은 기부처를 찾는 게 버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선한 결말을 위해 지금도 공부합니다. 아직 내 인생의 본론은 20%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등산 장학금을 테니스, 배드민턴 등 운동 장학금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받은 축복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기부는 중독입니다. 하지만, 기쁜 중독입니다.”송해수 기자

권준하 (경제63) 동문
등산 장학금의 뜻을 남긴 아버지를 기억하며, 권준하 동문이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부친 호 붙여 미산 장학금 조성
근검절약 정신 이어받아 부 일궈
“등산 장학금에 1457명이 몰렸대요. 나도, 학교도 깜짝 놀랐죠.”
권준하(경제63·사진) 동문의 입꼬리가 환히 올라갔다. 서울대 학생이 산에 오르면 장학금을 받는 ‘미산(彌山) 등산 장학금’. 이번 학기 처음 도입된 이 장학금은 올해 말 까지‘100대 명산 6회 정상 인증 시 최대 70만원 지급’이라는 조건에 신청자가 쇄도하자, 권 동문과 학생처는 당초 70명이었던 선발 인원을 300명 이상으로 확대했다. 성적도 소득도 관계 없이 ‘산에만 오르면 돈을 준다’는 이색 제안의 배경이 궁금해, 서초동 자택에서 권준하 동문을 직접 만났다.
“서울대 학생들, 책상 앞에서만 너무 오래 싸웠잖아요. 자연을 걸으며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권 동문은 서울대에 대한 장학 기부를 비롯해, 수많은 나눔의 여정을 걸어오며 언제나 서재에 걸린 부모님의 사진 앞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 호가 미산이에요. 서울대에 만든 ‘미산 장학금’도, 사랑의 열매에 만든 ‘미산 기금’도 다 아버지께 올리는 마음으로 한 겁니다. 서재에 사진을 걸어두고, 매일 기도합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고, 제가 어떻게 살고 있다고’ 마치 살아 계신 듯 말씀드리죠.”
부친 권 직 선생은 익산에서 세무서장을 지내며 근검절약과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했고, 대지주였던 조부는 학교 설립에 기부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했다. 권 동문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이 가르침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우리 집안은 유복했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근검절약’과 ‘참으면 덕이 된다(忍之爲德)’를 강조하셨어요. 시장에서 상가 월세를 받으시면서도 주변보다 절반으로 받으셨죠.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삶, 저도 그걸 따라가려 합니다.”
권 동문은 단순히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기부를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국내 최초로 ‘펀드 기부’를 개발해 원금을 보존하면서 수익금으로 장학금과 복지사업을 지속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서울대 상대에 5억원을 기부했는데, 장학금으로 7500만원을 지급하고도 현재 잔액이 11억원이 넘었습니다. 펀드 수익률로 따지면 150~160%쯤 되지요. 좋은 일을 하니 하늘도 도와주더군요. 매일 아침, 내 펀드보다 학교 펀드 수익률을 먼저 확인하는게 더 기쁩니다.”
기부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3년 사랑의 열매에 2억원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원광대병원, 사랑의 달팽이 보청기 지원, 여성 가장 난방기기, 연탄 나눔, 장학기금 조성 등 그가 여러 기관과 단체에 기부한 누적 원금은 101억원을 넘긴다. 수익금까지 포함하면 총 기부액은 훨씬 크다.
이 모든 선택의 뿌리는 ‘산’에 있다. 젊은 시절 매주 1000m 고지를 오르며 몸과 마음을 다잡던 권 동문은, 함께 산에 다니던 친구의 권유로 등산을 시작했다. “그 친구가 제 인생을 바꿨어요. 고인이 되었지만, 늘 고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씨앗 하나씩을 심는 것, 그게 제 꿈입니다.” 그 씨앗은 점점 자라나고 있다. 권 동문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부모와 오랜만에 손잡고 산에 올랐다는 학생, 형제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는 학생, 인생의 고비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들. 그런 편지를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이 옵니다.”
기쁨은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손자·손녀들이 ‘할아버지처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손주들이 주말마다 등산을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더군요. 자기도 장학금 받아야겠다며 웃으며 얘기하는데, 그게 제게는 세상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고향 익산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중앙시장 옆 창인동에서 자란 그는, 가족과 함께 대청천에서 수영하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기쁨을 돌려주고 싶어요.” 실제로 그는 고향 지역의 보청기 무상 지원, 장학금, 연탄 나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익산에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있다.
권 동문은 지금도 매일 펀드 공부를 한다. 강남의 증권사 수십 곳과 거래하며 100여 개 펀드를 운용 중이다. “좋은 기부처를 찾는 게 버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선한 결말을 위해 지금도 공부합니다. 아직 내 인생의 본론은 20%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등산 장학금을 테니스, 배드민턴 등 운동 장학금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받은 축복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기부는 중독입니다. 하지만, 기쁜 중독입니다.”송해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