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호 2025년 11월] 뉴스 기획
동숭동 마로니에, 기억하시나요
서울대 종합화 50년, 옛 캠퍼스는 지금…上
동숭동 마로니에, 기억하시나요
서울대 종합화 50년, 옛 캠퍼스는 지금…上

올해는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이 관악으로 통합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서울대 종합화 50년, 옛 캠퍼스는 지금…上

올해는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이 관악으로 통합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75년 단과대학들이 관악으로 모이기 전, 서울대의 역사는 서울 도심 곳곳에 뿌리내려 있었다.
동숭동의 문리대, 법대, 종암동의 상대, 공릉동의 공대, 용두동의 사대 그리고 수원의 농대까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옛 캠퍼스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이번호에 동숭동, 종암동, 수원 캠퍼스를 둘러보고 12월호에 공릉동, 용두동을 탐방한다.
이번 기획은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여정이자, 다음 50년을 향한 도약의 출발점이다.
대학 본부→ 예술가의 집, 법대→사대부설초, 상대→사대부고
동숭동 문리대·종암동 상대 캠퍼스





1. 옛 모습을 간직한 서울대 본부 모습. 지금은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세느강이 흘렀던 곳에 조성된 실개천. 3. 문리대 학생과 교수들이 즐겨 찾던 대학로의 중국요리집 진아춘, 지금은 위치를 옮겼다. 4. 법대 이전 후 문을 연 법대문방구, 상점의 이름이 과거의 터를 기억하게 한다. 5. 1956년 개업한 대학로의 명소 학림다방,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구◀ 법대정문 ▶현

구◀ 상대정문▶현

구◀ 향상림▶현
농대 후문 밖 푸른지대 딸기밭, 지금은 파3 골프장
수원 캠퍼스









1.수원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푸른지대. 옛 딸기밭에서 파3 골프장으로 변화됐다. 2. 옛 농대 본관 앞에 조성된 김상진 민주광장. 3. 1916년 심어진 진유 배나무. 이 과수를 아끼는 이가 오래 보존하고자 1984년 기념비를 세웠다. 4.농대 학생회관인 상록회관은 상상캠퍼스 리사이클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5. 1960~80년대 농대 학생들이 수원 청소년을 위해 만든 배움터 서둔야학. 딸기밭과 포도밭 사이에 있던 서둔야학은 현재 잡초만 무성한채 방치돼 있다.
대학 본부→ 예술가의 집, 법대→사대부설초, 상대→사대부고
동숭동 문리대·종암동 상대 캠퍼스





1. 옛 모습을 간직한 서울대 본부 모습. 지금은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세느강이 흘렀던 곳에 조성된 실개천. 3. 문리대 학생과 교수들이 즐겨 찾던 대학로의 중국요리집 진아춘, 지금은 위치를 옮겼다. 4. 법대 이전 후 문을 연 법대문방구, 상점의 이름이 과거의 터를 기억하게 한다. 5. 1956년 개업한 대학로의 명소 학림다방,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세느강은 복개로 사라지고
중식집 진아춘 3대째 명맥
4.19 기념탑은 관악으로 이전
1907년 세운 시계탑 건재
1975년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가 관악으로 이전한 뒤 동숭동 캠퍼스는 사라졌다. 캠퍼스의 울타리는 없어지고, 주변은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마로니에공원’을 걷다 보면 여전히 학교의 흔적이 느껴진다.
혜화역을 나와 공원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마로니에 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당시 학생들에게 마로니에는 문리대의 상징이었다. 이상봉(식물65) 동문은 입학 50주년 문집 ‘동숭클럽 이야기’를 통해 “마로니에 나무, 그것은 문리대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고 문리대 교정에서 가장 내세우던 나무였다”고 회고했다.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는 ‘서울대학교 유지기념비’(사진)가 자리한다. 옛 문리대 본관과 도서관, 강의동 등을 축소해 재현한 모형도 함께 남아있다.


정문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흘렀는데, 학생들은 그 물줄기를 ‘세느강’,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 불렀다. 지금은 복개돼 사라졌지만, 그 위로 걸어 들어오던 길이 오늘날의 혜화로다. 보도 곳곳의 네모난 철제 덮개들이 당시 개천의 흔적을 암시한다. 일부 구간은 2009년 ‘대학로 실개천 조성작업’을 통해 실개천으로 부활했다. 보도 옆 좁은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며, 옛 캠퍼스의 지형을 희미하게 되살리고 ‘세느강’의 기억을 일깨운다.
한때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아르코예술극장이 차지하고 있고, 대학본부로 쓰이던 붉은 벽돌 건물은 외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술가의 집’으로 변신했다. 계단과 아치, 중앙 홀의 구조가 본관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하나의 상징물인 4·19 기념탑은 관악 이전 때 함께 옮겨져, 현재는 4·19 공원에 세워두었다. 당시의 정신은 관악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법대 터에도 몇 가지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 정문으로 쓰이는 기둥은 원래 법과대학의 교문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지키지만, 한때 수많은 법대생이 오가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 맞은편에는 ‘법대문방구’라는 작은 가게가 있다. 법대의 이전 이후에 생겼지만, 이름만으로도 이 일대가 서울대 법대의 터였음을 알려준다.
1956년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법과대학동창회가 기증한 ‘정의의 종’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정의의 종’은 교정의 상징이었다. 현재는 관악캠퍼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자리하며, 그 문구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동숭동에서 도로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하나의 서울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리대와 법대가 떠난 후에도 변함없이 대학로를 지켜온 서울대 연건캠퍼스다.
“한적하고 고요하던 모교의 주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밤이면 어지러운 조명들로 현기증마저 일으키는 곳으로 변해버렸지만, 우리의 모교는 바로 그 자리에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의대 40회 동기들의 수필집 ‘그때 연건동 28번지’에 실린 윤형진(의학80) 동문의 말처럼, 서울대 의학의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여전히 그때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대 정문과 그 너머 단정한 황갈색 벽돌 건물이다.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자리를 지켜온 의학부 본관, 지금의 의대 행정관이다. 한 세기를 넘긴 건물 안에서는 지금도 행정과 연구의 시간이 이어진다. 옆에는 작은 수위실도 함께 남아있어, 80여 년 넘게 당시의 풍경을 거의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병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붉은 벽돌 시계탑 건물이 한 세기 넘는 세월을 품은 채 서 있다. 이곳은 1907년 완공된 옛 대한의원 본관, 지금은 서울대 의학박물관으로 그 역할을 이어간다. 이 건물은 서울 의학의 상징이다. 1970년대 말 병원 신관이 들어서며 본관 기능은 옮겨졌지만, 건물은 지금도 시간을 새기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과거의 의료기구와 교재가 전시돼 있다. 병원 인근에는 조선시대 함춘원의 일부였던 함춘문(含春門)이 남아 있다. 대한의원 시절에도 존재했던 문으로, 연건 캠퍼스의 역사를 증언한다.
그리고 최근, 이곳에 또 하나의 새로운 시간이 더해졌다. 의학도서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빛의 도서관’이라 불릴 만큼 자연광을 살린 설계와 따뜻한 목재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오래된 캠퍼스 속에서도 새 시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성북구 종암동에는 서울사대부설중·고등학교가 자리한다. 지금은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한 이곳이, 옛 서울대 상과대학의 교정이다.
당시 본관 앞에는 약 150평 규모의 소나무 숲이,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100평 남짓의 숲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이 숲을 ‘향상림(向上林)’이라 불렀다. 젊은 상과대 학생들의 패기와 진취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향상’이 붙었다. 지금도 그 일부가 교정에 남아 옛 캠퍼스의 자취를 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들이, 이곳이 한때 상과대학 학생들의 열정과 꿈이 자라던 자리였음을 말해준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한 뒤에도 일부 건물이 남았으나, 대부분 2010년대에 헐렸다. 그중 옛 상과대학 도서관 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지금은 사대부고의 체육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 학문과 사색의 공간이 이제는 젊은 학생들의 활력을 담는 장소로 변했다. 그러나 이 건물도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사라진 교정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동문들은 2017년 이곳에 ‘서울상대 기념비’를 세웠다. 화강석 비석에는 상과대학 본관 사진과 함께 “서울대 상과대학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는 사라진 캠퍼스의 기억을 이어주는 상징이 됐다.
“푸른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던 그 숲의 이름처럼, 우리의 젊음도 늘 위를 향해 있었다”는 당시 학생들의 말처럼, 지금도 교정에 남은 소나무들이 그 자리에 서서, 상과대학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정윤 기자
이정윤 기자

구◀ 법대정문 ▶현

구◀ 상대정문▶현

구◀ 향상림▶현
농대 후문 밖 푸른지대 딸기밭, 지금은 파3 골프장
수원 캠퍼스




1. 故 표현구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조성된 ‘사색의 동산’. 지금은 수원 시민의 쉼터가 됐다. 2. ‘ㅁ’자 형태의 강의동. 미네소타대 건물 형태를 따왔다는 설이있다. 3. 수원 캠퍼스 정문도 그때 그대로다. 정문 왼쪽의 럭비부가 뛰던 운동장은 갈대가 무성하다. 4. 농대 본관. 6.25 전쟁 당시 총알 흔적이 타일에 남아있다.
2003년 이전, 원형 그대로 보존
상록회관, 푸른얼, 사색의 동산…
최근‘김상진 민주광장’ 조성
수원의 서둔벌은 우리나라 농축산업의 중심지였다. 1962년 농촌진흥청이 들어섰고, 1946년 설립된 수원농림전문학교는 국립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됐다. 농업중심지로서 100여 년 역사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수원 농대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 속 채영신(최용신)의 실제모델이 거주했던 샘골과도 가까워 ‘푸른지대 상록캠퍼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군비행장 소음 문제, 서울대 종합화 정책에 따라 서둔벌을 떠났다.
수원 캠퍼스는 가장 늦게 옮긴 탓으로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본관, 강당, 옛 도서관 등 주요 건물들은 여전히 서울대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경기도로 이전된 농원예학관, 농공학관, 농화학관, 상록회관 등 부지는 ‘수원 상상캠퍼스’라는 시민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상상캠퍼스의 여러 건물 외관에는 지어진 연도가 적혀 있고, 학과 표지판 역시 대부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캠퍼스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과거의 농대를 마주하게 된다.
이날 탐방에는 김훈동(농학63) 전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이 동행했다. 수원 토박이인 그는 농대 졸업 후 농민신문 편집국장과 농협 경기본부장 등을 지내며 농업 현장을 지켜온 동문이다. 그는 “이 캠퍼스에는 오래된 수목과 넓은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며 “이전 결정 당시 아쉬움이 컸지만, 경기도 덕분에 그 모습이 보존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군 비행장이 가까워 사설 개발이 막히고, 대신 지자체가 관리하게 된 게 어떻게 보면 기적이지요.”
탐방의 첫 장소인 정문은 반세기 전 모습 그대로다. 좌측의 운동장은 한때 ‘농생대 럭비부’가 뛰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갈대가 일렁인다. 정문 밖 우측에는 ‘수원고등 농림학교 학생운동지 ₩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이곳이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정문 앞 다리는 동문들 사이에서 ‘미라보 다리’로 불리던 곳. 서호천이 흐르는 이곳은 당시 학생들이 다리 아래에서 낭만을 나누었던 장소이자, 정조대왕 능행차가 지나던 역사적 길이다.


위) 적벽돌이 인상적인 옛 도서관. 박물관으로 변경돼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이다.
아래) 옛 여자기숙사. 지금은 경기도 학생 기숙사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 적벽돌이 인상적인 옛 도서관. 박물관으로 변경돼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이다.
아래) 옛 여자기숙사. 지금은 경기도 학생 기숙사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문에서 조금 올라서면 단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지만, 한때 농대 도서관이었다. 그 옆에는 지붕 회랑이 독특한 2-1동이 있다. 일본의 건축양식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더 오르면 농대의 상징 같은 본관과 대강당을 마주친다. 외관은 지금도 당시 그대로다. 현재 농생명과학대학 창업진흥센터로 활용되고 있으며, 90년대 학번들에게는 교육관, 문화관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미음(ㅁ)자 구조의 강의동은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 당시 미네소타 대학교의 건물을 모방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중정에 잔디밭이 있어 햇살이 드는 구조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토론을 나누던 장소로 기억된다. 본관 벽 타일에 남은 패인 자국은 6·25 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라고 김훈동 동문은 설명했다.
본관 인근에 심어진 한 그루의 배나무가 세월을 증명한다. 1916년 농림학교 시절 심어졌다는 ‘진유(眞柚) 배나무’로, 배의 조상으로 불린다. 그 아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농업입국의 이상을 꿈꾸던 젊은 학도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본관 앞에는 최근 조성된 ‘김상진 민주광장’이 있다. 김상진 동문(축산68)은 1975년 4월, 유신헌법의 폭력에 항거해 양심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주 열사다. 그의 뜻을 기리는 조형물은 동문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서울대 민주화 운동사의 진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농대 학생회관이던 ‘상록회관’ 역시 현판이 그대로다. 현재는 상상캠퍼스의 업사이클 전시장으로 쓰인다. 인근에 세워진 조형물 ‘푸른얼(상록의 순우리말₩작은 사진)’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색의 동산’은 농학과 故 표현구(농학43졸)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해 조성된 공간이다. 국내 채소 품종개량 등 농작물 개량의 선구자였던 그는 이곳을 학생들의 사유의 정원으로 남겼고, 지금은 수원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하고 있다.
후문을 나오면 옛 딸기밭이었던 푸른지대가 나온다. 지금은 파3 골프장이 됐지만, 한때는 축제 때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찾던 명소였다.
탐방의 막바지는 후문을 나와 탑동 시민농장 아래 자리한 ‘서둔야학’에서 멈췄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농대 학생들이 수원 청소년을 위해 만든 배움터다. 황건식(농학63) 동문 등 여러 명이 교사로 참여해 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지만, 당시의 헌신과 열정이 여전히 공간에 배어 있다.
이날의 마지막 방문지는 옛 여학생 기숙사였다. 현재는 경기도 학생 기숙사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김훈동 동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수원캠퍼스는 서울대 농대의 뿌리이자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곳이 사라지지 않고, 시민의 공간으로 살아 있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지요.” 붉은 벽돌, 오래된 배나무, 낡은 회관 이름 하나하나가 서울대 농대의 역사다.
김남주 기자
김남주 기자





1.수원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푸른지대. 옛 딸기밭에서 파3 골프장으로 변화됐다. 2. 옛 농대 본관 앞에 조성된 김상진 민주광장. 3. 1916년 심어진 진유 배나무. 이 과수를 아끼는 이가 오래 보존하고자 1984년 기념비를 세웠다. 4.농대 학생회관인 상록회관은 상상캠퍼스 리사이클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5. 1960~80년대 농대 학생들이 수원 청소년을 위해 만든 배움터 서둔야학. 딸기밭과 포도밭 사이에 있던 서둔야학은 현재 잡초만 무성한채 방치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