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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호 2025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우린 민주주의 잘못 알고 있다

다수결 민주주의 결정 원리 아냐, 갈등은 간헐적 타협에 의해 멈춰
우린 민주주의 잘못 알고 있다


고정애(제약87)
중앙SUNDAY 편집국장
본지 논설위원

다수결 민주주의 결정 원리 아냐
갈등은 간헐적 타협에 의해 멈춰
어떤 장면은 오래 기억이 남는데 6년 전 대한민국을 두 쪽 냈던 이른바 ‘조국 사태’ 와중에 있었다. 서초동의 지하철 역내에서 20살 남짓한 의경 세 명을 향해 쉰 가까이 된 듯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주권자인데 주권자 말을 듣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내가 하겠다는데 왜 막느냐.”
의경들은 봉변당했다는 얼굴로 참아냈다. 이들 얼굴에서 잠시 혐오도 스쳤다.
그때 생각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주권자인 건 맞지만, 인구수로 나눈 N분의 1만큼의 주권을 가지고 다니며 시시때때로 ‘마패’처럼 꺼내들 수 있는 건 아니어서다.
정치학자 박상훈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국민주권론의 창시자인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주권은 쪼갤 수도 양도할 수도 없다. 주권이 ‘모두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모두에서 나와야’ 한다. 쪼개고 나눌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주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국민 주권이 쪼개지면 내전이고 양도되면 식민지 노예 상태다. 반면 시민 권리는 나눌 수 있기에 노동권·환경권·여성권 등으로 다원화할 수 있고, 양도할 수 있기에 단체나 정당으로 대표될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확인되는 주권을 일상적으로 동원한다면 극심한 갈등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본다.
“목소리 큰 소수가 지배하고, 상대와 끝장을 볼 때까지 증오를 최대화하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수결도 곡해 대상이다.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에서 일반적인 결정 원리라고 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적 결정 원리가 다수결인 건 아니다. 근대의 보르다·콩도르세·라플라스부터 현대의 도지슨 같은 수학자가 왜 선거 이론을 고심하고 미국 건국 아버지들이 논쟁했겠는가. 197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는 우리가 수세기에 걸쳐 쓰고 있는 너무나 익숙한 다수결 투표도 부적절한 사회선택 메커니즘 중 하나라고 봤다.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은 2020년 이렇게 말했다.
“다수결도 여러 종류다. 합의라든가, 타협이라든가 얼마든 있다. 그런 것 없이 일방적으로 다수결로 하는 건 내가 이해하는 방식에서 민주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다수의 지배가 무차별적으로 결정 원리가 된다면, 그것은 다수의 독재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다수결이 ‘절대무기’가 돼 있다. 이젠 그저 다수결 뿐이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들 사이에 이견·갈등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뜻이 다르다고 적일 순 없다. 그래서 타협해야 한다. 미국의 이름난 급진주의자인 사울 알린스키도 100%를 요구했다가 30%에서 타협해도 30%는 얻은 것이라고 봤다. 그의 말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 타협에 의해 멈추게 된다. 그 타협은 갈등과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를 자처했던 이에 의해 자유가 위협받고 한때 민주주의를 목놓아 불렀던 이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경쟁자가 적이라고, 타협은 패배나 굴종이라고 주장하며 비동조자, 비지지자는 소거해 버린다.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선택만이 선인 듯 몰아붙인다. 일군의 열성 그룹들이 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건 민주주의를 잘못 안 거다. “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고 시민들은 부패하게 마련”이라고 500년 전 누군가 말했는데 지금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