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71호 2025년 10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열정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열정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박정빈(바이오시스템15)
미시건대 박사과정 연구원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기도했고, 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풀이를 만들어냈다”
서울대 자연대·공대·농대 학생들은 1학년에 필수 과목인 ‘수학 및 연습’을 듣는다. 나는 수학 비중이 큰 과학고를 졸업했고, 면접에서 생물학과 수학 문제가 함께 출제되는 바이오시스템공학과에 진학했다. ‘수학 및 연습’ 수업 때는 과제를 제일 먼저 풀고 동기들과 공유할 정도로 수학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고 좋아했다. 그 무렵 나는 전공을 살려 수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그걸 바이오에 적용하고 싶었다.
과학고에서도 남들이 하지 않았던 비주류 수학 공부에 기대어 서울대에 올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수학에 대한 흥미가 커서 과제나 시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까지 찾아 읽었다. 더 어려운 문제를 찾아가다 보니 대학생 수학경시대회, 즉 대수경을 알게 됐고, 레거시 수학이 아닌 나의 수학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대수경 문제를 풀고 블로그에 공유하는 게 어느새 나의 취미가 되었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나는 34회 대수경에 나갔고, 전국구 2등인 금상을 받았다.
그 이후 정말 많은 시련이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기도했지만, 현실은 내 자리의 초라함을 반복해서 일깨웠다.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학계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 가는 인연과 운명 같은 사랑을 꿈꿨지만, 이 세상의 규칙은 나를 더욱더 고립시켰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만, 그 끝에 낙원은 없었다. 350만 년 동안 인류가 유지해 온 기본적인 욕망들이 내게 주어진 현실과 그렇게 조화롭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때 세상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 내가 올린 대수경 풀이가 직관적이고 창의적이라며, 다른 문제도 풀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게 뭐라고. 블로그에 사람들이 유입되고 때때로 댓글이 달리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래서 하나씩 풀어 가다 보니, 어느새 대수경 문제를 거의 다 풀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과정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몹시 즐거웠다. 한동안 나를 게으르게만 했던 공부가 부쩍 즐거워졌다. 글을 쓰다 보니 머릿속의 어렴풋한 관념들이 선명하게 새겨졌고, 지식의 영역이 실제로 넓어지는 걸 느꼈다. 세상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꾸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심장이 실제로 뜨거워졌다. 나는 이미 특별한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기도했고, 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풀이를 만들어냈다. 타인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무인도에 갇혀도 펜과 종이가 있다면 행복하다. 낙원이 없어도 모험을 떠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동경한 삶이 그런 형태였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기도했고, 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풀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들은 여러 실패들과 함께 서서히 찾아왔다. 미국 박사 입시에 한 번 실패했을 때, 과거의 기억들이 몰아치며 재기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그때 ‘운석 사냥꾼 진유하 아쿠아 행성편’을 집필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왜 연구를 하고자 했는지 떠올렸다. 유학 와서도 큰 슬픔에 빠진 적이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믿었던 확신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됐다. 마치 해리포터가 호숫가에서 본 빛을 아버지 것이라 착각했던 장면처럼. 고독했다. 그때 ‘이데아 글리치’를 집필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싶었지만, 더 깊은 곳에서 내 목소리가 궁금했다. 그제야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모든 욕망은 결국 지식으로 수렴해 갔다.
현재 미시간 대학교에서 생물정보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수학과 출신 지도교수와 함께 데이터를 다루며, 수학 문제를 풀 듯 연구한다. 한국에선 상상만 하던 연구를 실제로 하니 즐겁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연구에 진지해졌다. 박사 졸업 전까지 꼭 수학적 추론 모델을 의료 의사 결정에 도입하는 연구를 완성하고 싶다.
대수경 문제 풀이가 끝나자 암호공모전 문제를 풀고 싶어졌다. 한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맞닿아 있던 타원곡선암호 문제가 큰 인상을 남겼다. 언젠가, 적어도 죽기 전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 최근 대수경 검색결과를 보다가 나보다 더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을 알게 됐다. 미국 박사 유학을 준비하며 타원곡선에 깊은 관심이 있다고 했다. 도와주기로 했다. 어쩌면 내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