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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호 2025년 9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뒤쫓을까, 앞서갈까

전영기(정치80) 본지 논설위원, 시사저널 편집인
뒤쫓을까, 앞서갈까


전영기(정치80)
본지 논설위원
시사저널 편집인

요즘 세계인의 시선을 붙드는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힘이 곧 법’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일본, 유럽의 지도자들이 수천억 달러 투자 약속을 쏟아내면서 그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에 힘없는 국가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냉엄함이 서렸다. 돛대가 꺾이지 않으려면 나라의 실력이 튼튼해야 한다.
1930~40년대 독일은 히틀러를 피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나라를 탈출하면서 과학 강국의 지위를 잃었다. 인간 자원의 상실은 국가 쇠락의 길로 이어진다. 오늘의 한국 역시 두뇌 유출, 절대적 저출산으로 인적 자원의 소실이 우려된다.
이 대목에서 인재 양성의 최전선에 있는 서울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다른 강대국들과 물량전에서 승산이 없다면 서울대가 교육력으로 정예 인재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적으로 편안한 자리에서 유홍림 총장을 만났다. 정치철학을 전공한 유 총장답다고 할까. 그는 ‘창조’와 ‘융합’에 대해 얘기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知)’와 플라톤의 ‘대화 속 우정(friendship-in-dialogue)’을 언급했다. “지식은 아는 것 없음을 아는 데에서 출발하며 진리는 아무런 제한 없이 우정어린 환대 속에 나누는 대화에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불현듯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인재의 힘은 지식과 진리에 접근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교육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 교육은 점수와 서열에 묶여 있다. 수능은 창의성의 싹을 자르고, 대학 강의는 암기식 지식 전달을 맴돈다고 한다. AI가 기억과 계산을 대체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질문하는 능력,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 학문들을 잇는 융합의 힘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서울대가 걸어야 세 개의 길을 생각해 봤다.
첫째, 학부 교육의 혁신이다. 논문 편수, 연구비 액수보다 학생 한 명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키워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으면 한다. 실속있는 학부 중심 대학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
둘째, 융합 교육의 강화. 철학도와 공학도, 경영학도와 의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실험하길 바란다. 전공의 울타리를 허물고 서로 다른 언어를 연결할 때 새로운 지식이 태어난다.
셋째, ‘무지의 지’와 ‘대화 속 우정’의 기운이 모교에 충만하길. 자기 한계의 자각, 겸손함이 열린 토론을 이끈다. 상대를 이겨 먹겠다는 논쟁보다 유목민처럼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대화가 피어나길.
뒤쫓는 대학으로 남을 것인가, 앞서가는 대학으로 거듭날 것인가. 현재에 안주할 것인가, 세계를 새로 탄생시키는 불씨가 될 것인가. 서울대의 선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