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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호 2025년 9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믿음과 냉소 사이

이주영 (지리97) 본지 논설위원, 주간경향 편집장
믿음과 냉소 사이


이주영
(지리97)
본지 논설위원
주간경향 편집장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10대 시절, 나에게도 롤 모델이 있었다. 지금은 ‘보수 여전사’란 타이틀을 지닌 ‘종군 기자’ 이진숙.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취재 전선을 누비는 그 모습은 강렬했다. 그 활약상을 보면서 ‘나도 정의와 인권을 위해,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기자가 돼야지’ 다짐했다. 이후 그 여전사가 보여준 행보는 종군 기자라는 타이틀조차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정치색이 진하게 배였지만, 그 때 만큼은 기자라는 직업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엄청나다고 믿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기자가 됐다. 24년이 흘렀다. “왜 기자가 되려고 하나요?” 얼마 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기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소양, 논술이나 면접 등 입사 시험을 패스하기 위한 요령 등 여러 질문을 받았다.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경험한 내용들을 아는대로 설명해 주었다. 한 편으로는 ‘그 정도 스펙이면 로스쿨 가지 왜 기자를 하려고 하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학생들에게 기자가 되려는 이유를 물어봤던 이유다.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어서, 단순한 사실이 아닌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싶어서, 정론직필 공명정대라는 언론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청춘들의 포부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모나리자 미소가 나왔다. 
‘그래, 맞아. 나도 그런 꿈을 가졌던 때가 있었지. 그런데 말야, 지금은 언론이 무슨 얘기를 해도 믿질 않는걸? 팩트가 나와도 나랑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안 믿어. 한쪽을 비판하면 편파 보도 한다고 욕하고, 양쪽 모두 비판하면 잘난 척한다고 욕하는게 현실이야. 언론사들이 베껴 쓰기, 따옴표 저널리즘에 갇혀 쓰레기 같은 기사들만 쓴다고 욕하지? 그런데 땀 흘리고 공들여 심층 기획물 만들어 포털 뉴스 주요 자리에 떡 하니 걸어놔도 조회수는 연예인, 정치인 가십 기사가 다 가져가. 더 절망스럽게 만드는 게 뭔 줄 알아? 유튜브야.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말발 좀 된다는 사람들은 죄다 나와 팩트와 뇌피셜을 섞어가며 썰을 푸는데 무미건조한 기사로 이겨낼 재간이 있겠어? 온라인 속보, 보도자료 등에 치이다 퇴근하는 길이면 헛웃음이 나오는 게 우리 일이야.’
차마 입 밖으로 속마음을 꺼내진 않았지만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행간에 묻어있는 의미를 그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한 명의 독자라도 읽어준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자리를 파했다. 왜 기자가 되려고 했나요? 나에게도 물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서요.
‘무기력은 전염된다. 스스로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도 상황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미디어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 듣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그리는 일을 그만두어 버린다. (중략) 우리가 냉담하고 무관심해질수록 민주주의 시스템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며 뒤로 물러난 채 다른 사람들에게 무대를 맡긴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을 바꾸어야 한다’
- 로냐 폰 부름프자이벨,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