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호 2025년 9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한국의 나무를 사랑했던 민병갈…그분에게 받은 장학금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책임, 천리포 수목원 우리에게 남겨
한국의 나무를 사랑했던 민병갈…그분에게 받은 장학금
임효빈 (화학61) 전 대우고등기술연구원장

민병갈(閔丙葛₩Carl Ferris Miller) 1973년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하고 1979년 귀화했다. 2002년 작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책임
천리포 수목원 우리에게 남겨
장학금 받으면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신통찮은 성적표를 가지고는 언감생심 전액장학금은 커녕 수업료 일부를 보태주는 찔끔 장학금조차도 엄두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랴? 등록금 내는 학기 초만 되면 대책 없으신 엄마 아버지는 왜 내 눈치만 살피시는지... 얘가 다음 학기는 제대로 다닐 수 있으려나? 아르바이트 두 탕을 뛸지언정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수업료 걱정은 절대 마시라고 큰소리는 쳐 놓았지만, 휴학 안 하고 그럭저럭 4년 만에 졸업만 하면 취직은 바라볼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던 차였다.
대학신문(그때는 일주일에 월·목 두 번 내던) 학생기자로 일하며 뉴스거리 찾아 거의 매일 드나드는 학생과 사무실에서였다. 주임 선생이 무슨 표창장같이 생긴 깔끔한 공문 한 장을 내민다. 그게 아트지였던가, 매끈한 종이 머리맡에 박혀 있는 처음 보는 우아한 문장, Royal Asiatic Society. ‘이게 뭐 하는 데지?’ 괄호 안에 조그맣게 ‘영국왕립아시아학회’라고 박혀 있다. 주임 선생님은 아마도 이 공문이 잘 못 온 게 아닌가? 혹은 우리 공대에는 해당 없는 사항이라고 젖혀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발송 날짜가 꽤 여러 날 지난 뒤였다. 나더러 공문 내용을 대학신문 기삿거리로 삼으라는 건지, 관심 있으면, 자신 있으면 한번 신청해 보라는 건지.
설립 목적 등 간단한 학회 소개와 장학제도 취지에 이어 소수의 장학생 선발 요령·신청 방법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몇 번을 훑어보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신청 자격에 ‘우수한 성적’같은 겁나는 글자는 안 보인다. 성적 상관없이 장학생 뽑는 기관도 다 있나? 단, 신청서 작성은 반드시 영문으로. 그래? 솔깃해진다. 그런데, 웬걸? 신청 기일이 벌써 지났잖아? 그래도 일단 해 보자. 부랴부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짜내 가지고 정성 들여 손으로 써 내려갔다. 워드, 한글 그런 거 없던 시절이다. 어쨌든 밑져야 본전 아닌가?

천리포 수목원 전경
며칠 후, 우편으로 답신 받은 대로 소공동 한국은행 별관의 널찍한 사무실에 찾아갔다. 군복을 꺼멓게 염색해 줄여 입은 촌스럽고 얼떨떨한 나에게, 그는 집안 사정 어려운 조카를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처럼 보였다. 미국인이면서 학회 한국지부 책임자인 자기가 학회로부터 장학생 선발을 위촉받았는데, 그다음에는 어쩌고저쩌고 자상한 설명 끝에, 기일이 지났지만 네 신청서를 받고 너를 꼭 만나보고 싶었노라고. (정말요?) 아니, 그런데 이분이 외국인인가 싶게 한국말을 우리처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장학금 지원자 인터뷰인 셈인데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편안한 대화를 건네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좌불안석 전전긍긍 피면접자인 처지의 나에게 기껏 묻는다는 게 신청서 에세이에 이런 표현은 어디서 배웠냐는 정도. 마치 놀랍다는 듯이.
한 달쯤 지나, 열 명이 넘는 1960년대 초의 가난한 장학생들을 서대문 창천동 자기 집(고풍스런 한옥집을 눈에 안 뜨이게 서양식으로 꾸민)으로 초청해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우리 궁중음식에 그림으로만 보던 서양 과일을 대접해 주던 좀 별난 외국인이로구나 정도 생각했을 뿐, 미국 사람인 그가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 와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면서 한국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부끄럽게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더구나, 영국 Royal Asiatic Society 장학금의 한 몫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자비로 출연해 왔다는 사실을 몇 사람이나 알았으랴.
한국인 못지않게 이 땅의 나무를 사랑했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충남 서해안 만리포 근처 천리포 수목원에서였다. 살아 있는 그가 아니라 그가 가꾼 목련 정원 한구석의 자그마한 흉상, 그리고 연못 너머 소박한 기념관에 걸린 생전의 그의 사진으로였다.
임효빈 (화학61) 전 대우고등기술연구원장

민병갈(閔丙葛₩Carl Ferris Miller) 1973년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하고 1979년 귀화했다. 2002년 작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책임
천리포 수목원 우리에게 남겨
장학금 받으면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신통찮은 성적표를 가지고는 언감생심 전액장학금은 커녕 수업료 일부를 보태주는 찔끔 장학금조차도 엄두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랴? 등록금 내는 학기 초만 되면 대책 없으신 엄마 아버지는 왜 내 눈치만 살피시는지... 얘가 다음 학기는 제대로 다닐 수 있으려나? 아르바이트 두 탕을 뛸지언정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수업료 걱정은 절대 마시라고 큰소리는 쳐 놓았지만, 휴학 안 하고 그럭저럭 4년 만에 졸업만 하면 취직은 바라볼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던 차였다.
대학신문(그때는 일주일에 월·목 두 번 내던) 학생기자로 일하며 뉴스거리 찾아 거의 매일 드나드는 학생과 사무실에서였다. 주임 선생이 무슨 표창장같이 생긴 깔끔한 공문 한 장을 내민다. 그게 아트지였던가, 매끈한 종이 머리맡에 박혀 있는 처음 보는 우아한 문장, Royal Asiatic Society. ‘이게 뭐 하는 데지?’ 괄호 안에 조그맣게 ‘영국왕립아시아학회’라고 박혀 있다. 주임 선생님은 아마도 이 공문이 잘 못 온 게 아닌가? 혹은 우리 공대에는 해당 없는 사항이라고 젖혀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발송 날짜가 꽤 여러 날 지난 뒤였다. 나더러 공문 내용을 대학신문 기삿거리로 삼으라는 건지, 관심 있으면, 자신 있으면 한번 신청해 보라는 건지.
설립 목적 등 간단한 학회 소개와 장학제도 취지에 이어 소수의 장학생 선발 요령·신청 방법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몇 번을 훑어보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신청 자격에 ‘우수한 성적’같은 겁나는 글자는 안 보인다. 성적 상관없이 장학생 뽑는 기관도 다 있나? 단, 신청서 작성은 반드시 영문으로. 그래? 솔깃해진다. 그런데, 웬걸? 신청 기일이 벌써 지났잖아? 그래도 일단 해 보자. 부랴부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짜내 가지고 정성 들여 손으로 써 내려갔다. 워드, 한글 그런 거 없던 시절이다. 어쨌든 밑져야 본전 아닌가?

천리포 수목원 전경
며칠 후, 우편으로 답신 받은 대로 소공동 한국은행 별관의 널찍한 사무실에 찾아갔다. 군복을 꺼멓게 염색해 줄여 입은 촌스럽고 얼떨떨한 나에게, 그는 집안 사정 어려운 조카를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처럼 보였다. 미국인이면서 학회 한국지부 책임자인 자기가 학회로부터 장학생 선발을 위촉받았는데, 그다음에는 어쩌고저쩌고 자상한 설명 끝에, 기일이 지났지만 네 신청서를 받고 너를 꼭 만나보고 싶었노라고. (정말요?) 아니, 그런데 이분이 외국인인가 싶게 한국말을 우리처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장학금 지원자 인터뷰인 셈인데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편안한 대화를 건네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좌불안석 전전긍긍 피면접자인 처지의 나에게 기껏 묻는다는 게 신청서 에세이에 이런 표현은 어디서 배웠냐는 정도. 마치 놀랍다는 듯이.
한 달쯤 지나, 열 명이 넘는 1960년대 초의 가난한 장학생들을 서대문 창천동 자기 집(고풍스런 한옥집을 눈에 안 뜨이게 서양식으로 꾸민)으로 초청해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우리 궁중음식에 그림으로만 보던 서양 과일을 대접해 주던 좀 별난 외국인이로구나 정도 생각했을 뿐, 미국 사람인 그가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 와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면서 한국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부끄럽게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더구나, 영국 Royal Asiatic Society 장학금의 한 몫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자비로 출연해 왔다는 사실을 몇 사람이나 알았으랴.
한국인 못지않게 이 땅의 나무를 사랑했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충남 서해안 만리포 근처 천리포 수목원에서였다. 살아 있는 그가 아니라 그가 가꾼 목련 정원 한구석의 자그마한 흉상, 그리고 연못 너머 소박한 기념관에 걸린 생전의 그의 사진으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