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70호 2025년 9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공학도에서 지휘자로…춤추며 공연장 들썩들썩

공학적 사고 악보 해석에 도움 매 공연 매진, 무대 직캠 수백만 뷰
공학도에서 지휘자로…춤추며 공연장 들썩들썩


백윤학 (전기94·작곡96) 영남대 음대 교수

공학적 사고 악보 해석에 도움
매 공연 매진, 무대 직캠 수백만 뷰

지휘봉이 공기를 가르기 시작하면, 어느새 무대는 춤판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춤추는 지휘자’라 부른다. 그의 지휘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은 수백만 뷰를 넘겼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도 출연했다. 매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가운데, 그는 지금 가장 주목받는 젊은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매진 행렬의 무대와 대구의 강의실을 바쁘게 오가는 백윤학(전기94·작곡96) 교수를, 9월 5일 반포의 연습실 근처에서 만났다. 리허설을 막 마친 그는 무대 위의 역동적인 모습과 달리 담담하고 따뜻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배경에는 독특한 무대 매력이 있다. 지휘대에서 스텝을 밟고 전신으로 리듬을 타며 지휘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단순한 음악 감상을 넘어 하나의 퍼포먼스로 다가왔다. SNS 직캠 영상은 빠르게 확산됐고, 주요 쇼츠 영상은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관객과 호흡하는 흥겨운 퍼포먼스는 공연장을 밝고 즐겁게 이끌었고, 연주자들조차 웃음을 참아야 할 만큼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공연도 많이 와주시고, 알아보시는 분도 많아졌죠. 다만 저는 춤을 춘 게 아니라, 음악에 빠지다 보니 몸이 움직인 것뿐이에요. 제 몸이 저보다 먼저 반응하더라고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뒤에는 묵묵히 길을 닦아온 시간이 있었다. 서울대 공대 재학중, 합창단 활동에 매료된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공을 바꿨다. 지휘는 성악이나 작곡처럼 조기 훈련이 절대적인 전공은 아니어서, 다양한 배경과 경험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는 공학에서 익힌 분석적 시각을 음악 해석에 연결하며 자신만의 길을 열어갔다. “결심이라기보다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장난감을 꼭 갖고 싶어 하듯이, 저에겐 지휘가 그랬습니다. 경제적 현실이나 미래 불안을 따질 겨를이 없었어요. 하고 싶어서 한 거죠.”
그의 지휘 철학은 분석과 직관의 조화에 있다. 악보를 해석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공학적 사고가 뒷받침되며, 음악적 직관은 그 위에서 살아난다. 그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일”을 지휘의 본질로 정의한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힘을 모아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촉매제예요. 무의식적으로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호흡과 몸짓에 반응하죠. 엄마가 음식을 먹일 때 ‘아’하면, 아기도 같이 입을 벌리는 것처럼요.” 연주자들의 잠재력을 깨우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의 힘에 스스로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 몸 전체로 음악을 표현하는 모습이 ‘춤추는 지휘자’라는 별명을 만든 것도, 그 몰입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과학고, 서울대에 이어 장학금 유학까지, 굴곡도 어려움도 없었다고 말하지만, 명문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하고 아무런 연고도 연줄도 없는 외국인이 미국에서 지휘자로 취직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장의 불합격 통지서를 그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끝없는 도전과 낙방의 시간을 지나며, 외로움과 고립감 속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기도 있었다. 지휘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 끝에 템플대 대학원 오페라 코치 과정에 입학했고, 이후 미국에서 여러 편의 오페라를 지휘하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 과정을 거쳐 2014년 영남대 교수로 임용되며 귀국한 그는, 교육자이자 지휘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학창시절의 서울대는 그에게 보석을 찾는 경험의 장이었다. 공대에 몸담고 있었지만 음악대학, 인문대학, 사범대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수업을 듣고 활동했다. “학교 곳곳에 보석이 있었고, 그 보석들을 발견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는 그렇게 얻은 다채로운 경험이 지휘자로서의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부채를 가진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했다.
음악 교육에 대한 신념 역시 깊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어린이 합창과 오케스트라 교육에 힘쓰고 있다. “2008년 대구 초등학생 집단 성폭력 사건을 접했을 때, 음악 혹은 합창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예술이 단순히 기술을 넘어 정서적·사회적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린이 합창 교육을 “개별 소리의 성장이 아니라 음악 속 주파수를 경험하게 하는 기회”라고 설명하며, 조기 합창 교육이 인성 교육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래를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더 단단해졌다. 목소리엔 자긍심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미국의 세계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을 꺼냈다. “‘음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늘 공감합니다. 저 역시 그 힘을 믿고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음악으로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퍼뜨리는 지휘자였다.
장차 은퇴 후에도 단발성 공연을 넘어 ‘사회 음악’의 체계를 세우고, 인성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을 꿈꾸고 있다. “나이가 들어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도 소중하지만, 젊을 때 인문학과 예술을 배우면 더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음악은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에요.” 그가 말하는 음악과 공부는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모니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의 지휘봉은 앞으로도 힘차게 춤을 출 것이다. 송해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