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호 2025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무역으로 번 돈 15억 기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최선을 다하자 원칙 지키며 부지런히 사니 매일 즐거워, 광주교대에도 3억원 쾌척 로타리클럽 활동도 열심
“무역으로 번 돈 15억 기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최선을 다하자 원칙 지키며
부지런히 사니 매일 즐거워
광주교대에도 3억원 쾌척
로타리클럽 활동도 열심
서울 용산의 한 아파트. 8월 30일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91세의 조기호(화학교육54·사진 왼쪽) 기호물산 회장과 아내 이영자(생물교육56) 동문을 만났다. 사범대학 시절 ‘피아노 치는 미인 후배’를 보고 인생의 목표를 결혼으로 정했다는 그는, 6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곁에서 여전히 청년 같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최근 두 사람은 서울대총동창회 장학재단인 관악회에 총 15억원의 거액을 기부하며 후배들을 향한 사랑도 전했다. 조 회장은 “나는 지금 행복해요. 이 사람과 함께 늙어가며 즐겁게 사니까요”라고 했다. 한 시대를 살아낸 로맨티스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요청이 부담스러우셨을 텐데, 동창회 장학금 고액 기부자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먼저 요즘 일과부터 여쭙겠습니다.
“아침 5시, 늦어도 5시 50분이면 일어납니다. 저 사람(아내)도 같이 일어나요. 밤 9시 넘으면 자고요. 규칙적인 게 제일 좋아요.”
-신문도 보고, 회사에도 나가신다고요.
“매일경제를 챙겨 봅니다. 그리고 회사에 갑니다. 집에만 있으면 이 사람도 귀찮지 않겠어요? (웃음) 회사에 나가면 하루가 즐거워요. 이메일도 보고 답장도 하고요. 실무는 아들이 하지만 출근 자체가 낙이에요. 대개 오후 3~4시면 들어옵니다.”
-사모님은요.
“저는 매일 장바구니를 들고 용산역 이마트를 한 번 다녀와요. 운동 삼아서요. 같이 일찍 일어나서 함께 움직이죠.”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사는 겁니다. 잘 자고, 잘 일어나서, 회사도 가고, 사람도 만나고. 노인의 즐거움이 딴 게 있겠어요? 그게 즐거움이죠.”
-술, 담배는 안 하시죠.
“젊을 때 실수를 크게 하고 나서는 거의 안 마십니다. 모임에서 어쩔 수 없이 한두 잔 정도 하는 수준이죠. 담배는 안 했습니다. 나쁜 건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게 좋아요.”
-운동은 어떤 식으로 하셨습니까.
“골프를 많이 쳤지만 그건 취미죠. 운동은 걷기. 한강 공원을 많이 걸으니 혈압이 내려가더군요. 약을 끊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지금도 피트니스 센터에서 런닝머신을 꾸준히 합니다. 건강에 ‘걷는 것 이상 없다’는 게 제 결론이에요.”
-고향이 전남 광주시죠. 학창시절은 어땠습니까.
“수창초등학교, 그리고 광주사범학교(6년제)를 나왔습니다. 졸업하면 곧장 교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교사는 하기 싫었어요. 공대로 가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서울대 공대 입학원서를 안 써주는 겁니다. ‘1년 교사하면 써주겠다’는데 그 1년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서울대 사범대학’으로 가겠다고 하니 입학원서를 써주시더군요.”
-적성에는 안 맞았다고 하셨죠.
“그렇지요. 그래서 기술고시로 만회를 해보려 했습니다. 3학년 때 상공부 사무관(기좌)이 되는 길이 있었는데, 그 제도가 그다음 해에 없어졌어요. 여러모로 꼬였죠. 교사를 잠깐 해볼까 해도 자리가 없고….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난감하더군요.”
-그럼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광주에서 상경해 자취를 전전하고, 입주교사도 했습니다. 만리동 꼭대기에 허름한 집에서 생활하고 비참하다고 할 만큼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했어요. 제 힘으로 해결했죠. 입주교사 하던 집에서 저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밤 바로 나와 대학신문 편집실에서 신세도 지고…. 그래도 자존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공부는 곧잘 해서 특대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사모님을 3학년 때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고민이 많던 시절, 화학교육과 실험실 바로 옆 강당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군요. 살짝 보니 얼굴이 아주 예뻤어요. 보통 미인이 아니었죠. 그때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사모님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요.
“시집을 사서 건넸는데 안 받더군요. 땅에 던지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집을 알아내 슬쩍 두고 오기도 했지요. 편지? 여러 번 보냈습니다. 결국 마음을 얻었습니다.”
-결혼을 목표로 돈을 벌자 결심하셨습니다. 당시 전략은 무엇이었나요.
“1960년대 대한민국은 생산 기반이 약했고, 수입해서 파는 무역이 돈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큰 무역회사는 ‘간판’보다 실적을 봅니다. 서울대 나왔다고 오라 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삼덕무역에 들어가 실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일본 등에서 들여온 물품을 공장과 시장에 맞게 공급했죠. 수익을 많이 냈고, 그 경험으로 제 회사 기호물산을 차렸습니다.”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졸업하고 3년 뒤인 1961년에 했어요. 열심히 돈을 모아 큰 집을 샀습니다.”
-당시 제조업도 병행하셨다고요.
“그때 무역회사는 대체로 제조를 겸했습니다. 화학, 섬유, 필요한 건 다 했죠. 전성기에는 국내 직원이 100명 넘었고, 해외까지 합치면 더 많았습니다. 매출이요? 달러로 몇백만은 거뜬히 넘었습니다.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라 ‘목적’이었죠. 내 삶의 목적은 결혼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업의 원칙을 꼽으신다면.
“‘최선을 다한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다 어려워요. 운칠기삼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운이 100%여서도 안 됩니다.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요. 결국 ‘7:3’ 정도로 노력이 3 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게 천리예요.”
-젊은 시절, 연희동에 250평 규모의 집을 마련해 30년을 사셨다고요.
“넓은 정원에 나무, 화초, 잔디…. 어프로치 샷 연습도 했습니다. 재미로 양봉도 했고요. ‘무에서 유를 만든 집’,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하지만 나이 들면 관리가 어렵습니다. 제 값보다 더 쳐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팔고,여기 아파트로 이사왔지요.”
-지금 거실에도 화분이 가득합니다.
“요즘 취미예요. 모르면 휴대전화로 이름 찾아보고 돌보고요.”
-부부 싸움한 적은 있을까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했어요. 서로의 주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사모님은 졸업 후 교사 활동은 안 하셨나요.
“(이영자 동문) 1년 하고 그만 뒀지요.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며 이 사람 뒷바라지하느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남편은 어떤 분입니까.
“(이영자 동문) 존경스럽고 훌륭한 분이죠. 늘 베푸는 걸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회사든 모임이든 먼저 내놓는 분이세요.”
-자녀·손주 소식도 전해주시죠.
“2남 1녀에 손주는 7명입니다. 손주 중 6명이 여자 아이에요. 장손자는 미국에서 공부 중인데 서울대 박사 과정에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보탬이 돼야죠. 증손도 봤습니다.”
-자녀 교육에서 강조한 거라면.
“‘남을 위해 일하라. 거기서 만족과 행복을 느껴라’, 항상 그겁니다.”
-동문들이 궁금해할 질문입니다. ‘서울대 덕’을 보셨습니까.
“덕은 많이 못 본 것 같은데요(웃음). 사범대가 적성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사회는 ‘서울대’라는 이름을 인정하더군요.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습니다. 결국은 사람이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이번 15억 장학기금은 서울대총동창회 장학재단 역대 기부 순위로도 손꼽힙니다. 동력이 궁금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여력이 되면 더 하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많이 베푸셨다고요.
“(이영자 동문) 회사 망년회 때도 청소·경비 하시는 분들 꼭 챙겨드리고, 로타리클럽에서도 꾸준히 내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 모여서 지역에 필요한 일을 했고요. 액수를 따지기보다 ‘생활’처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광주사범, 현 광주교대에도 나눔을 이어오셨죠.
“광주교대에도 3억원을 기부했습니다.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요.”
-‘조기호·이영자 특지’ 장학금을 받을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성실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해라. 그 두 마디면 충분합니다.”
-지금의 자신에게 한 줄 평을 쓰신다면.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할 수 있는 만큼 부지런히 살았지요.”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은요.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남은 생을 위한 원칙은.
“걷기,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과 평온하게 사는 것입니다.”
조기호 동문은 인터뷰 중간중간 “이 정도하면 되지 않았나, 누가 남 사랑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겠냐”며 “인터뷰 끝”을 외쳤다. ‘졸혼’이니, ‘퇴혼’이니 하며 부부의 가치가 약해지는 요즘, 60여 년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이들어 가는 부부의 모습은 참 귀해 보였다.
한사람을 사랑해서 부지런히 살았고, 그 사랑으로 후배들의 학업과 꿈을 돕고 있다. 심플하지만 복된 삶이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