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호 2025년 8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설입, 봉사리, 신사리…
설입, 봉사리, 신사리…

김성균
치의학87
서울대치과병원 교수
얼마 전 서울대총동창신문에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어느 지면에 실린 내가 쓴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며 ‘추억의 창’에 기고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큰 영광이자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5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내가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과 함께 추억을 회고하며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고하겠다고 답한 뒤 “나의 추억엔 무엇이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추억 하나. 어쩌다 보니 대학 동기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게 됐다. 딸은 인문대를 졸업했는데, 요즘 학생들이 주로 어디에서 모이느냐고 물었더니 딸은 ‘설입’이라 했다. 서울대입구의 줄임말이라는 설명에,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줄여서 말을 하느냐며 타박한 적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니, 우리가 신입생이던 시절도 사회가 혼란스러워 학교에 제대로 나오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정문에 전경이 깔려 있어 출입을 막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면 친구들과 함께 ‘봉사리’나 ‘신사리’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봉천사거리와 신림사거리의 줄임말이었다. 우리도 그 시절 줄임말을 많이 썼던 것이다. 여러 말을 줄이거나 바꿔서 썼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참신함과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특권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이 맞다.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으로 도전하고 성취하는 학생들의 역량은, 아마 그런 기질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추억 둘. 대학 시절 의료봉사 연합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학기 중에는 매주 토요일 서울에서, 방학 중에는 지방에서 봉사를 했다. 봉천동 고개 위쪽에서도 봉사를 했는데,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장비를 들고 오르내리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개발돼 그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내겐 오롯이 남아 있는 추억이다. 어느 해 겨울방학, 봉사 활동을 위해 간 오지는 몹시 추웠다. 매일 아침 진료장소에 난로를 피우러 걸어가야 했는데, 눈물과 콧물이 저절로 흘러 콧속이 하얗게 얼었다. 숙소에서는 가스 냄새가 나 연탄을 빼고 잔 적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둔 물이 얼어 있었고, 얼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밥도 직접 해 먹었는데, 큰 가마솥의 장작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지금은 사회안전망이 많이 갖춰졌지만, 의료 접근성에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 졸업 후에도 이런저런 계기로 먼 지방이나 서울의 쪽방촌에서 봉사 활동을 했고, 몽골 등 해외에도 다녀왔다. 특히 2019년 우즈베키스탄 의료봉사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련 시절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 어르신들을 만나 틀니를 만들어 드렸다. 일주일 남짓한 일정이 촉박했지만, 늦은 밤까지 이어진 작업은 피곤하면서도 보람 있었다. 그분들이 한국말로 들려준 이야기들, 첫 겨울을 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 다음 해 밭을 일구고 자식을 낳아 정착한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날의 보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의료봉사는 내게 많은 공감과 이해를 안겨준 경험이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 그래픽 디자이너
추억 셋. 우리 때는 교련 수업이 있었다. 버들골을 지나 캠퍼스 꼭대기에 있는 학군단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학교 내에는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정문에서부터 걸어 올라가야 했다. 특히 교련 수업은 출석이 중요했기에, 늦지 않으려 뛰다 보면 오르막에 지쳐 포기하고 지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대 학생들은 다리가 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2013년 관악서울대치과병원 준비단장으로 갔을 때는 학내에 버스가 다니고 훨씬 편리해져 있었다. 하지만 병원 인근 대학에서 정문까지 오려면 빙 둘러 가야 했고, 중간에 건널목만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치과병원 건립 당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버스정류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기존 정류장은 멀고 경사가 심해 의료 약자들이 오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의료 접근성은 곧 교통 약자 문제와 연결돼 있다. 병원에 접근하기 어려우면 병원의 의미도 퇴색되기 마련이다. 단순히 생각했던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정류장을 설치하려면 건널목이 있어야 했고, 건널목에는 신호등이 필요했으며, 신호등을 위한 전봇대도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모두 설치할 수 있었고, 안전을 위한 사전신호등까지 마련한 뒤 관악치과병원장 임기도 마무리했다. 요즘 관악에 있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건널목은 지금도 학생들이 등하굣길에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통로가 되었다고.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모교를 위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듯하다.
뜻하지 않은 제안을 통해 나의 기억들을 더듬어볼 수 있었고, 많은 추억이 남아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 글 또한 소소한 즐거움이자 새로운 추억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