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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2025년 8월] 문화 신간안내

무심코 떠오른 생각들을 낙서처럼 적다 보니

화제의 책
무심코 떠오른 생각들을 낙서처럼 적다 보니



지공거사의 하루하루
이정구(전기공학61) 전 대우건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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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거사의 하루하루’는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조용한 성찰이 담긴 수필집이다. 저자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은 전기공학도이자 기업인이었지만 여느 문인 못지않다. 화려한 수식이나 감정의 과장이 없다. 문장은 담백하고 단정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지공거사’는 지하철을 무료로 타는 나이, 즉 노인을 일컫는 은유다. 하지만 이 수필집은 노년의 자기 연민이나 세월에 대한 탄식으로 가득하지 않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 일상을 바라보는 여유와 유머, 그리고 자신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 솔직함이 있다.
책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보청기를 처음 착용했을 때의 혼란, 경로석 앞에서 느낀 쓸쓸함, 치과 치료 도중 떠오른 유년기의 기억, 96세 어머니를 복지관에 모시기 위해 쓴 편지. 모두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선은 깊고 넓다. 종종 글을 읽다가 불쑥 목이 메인다. 공감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는데도, 어느새 감정의 결이 따라온다.
특히 인상 깊었던 글은 ‘어머님 보십시오’라는 제목의 편지글이다. 복지관을 거부하시는 어머니께 보낸 글에는 설득의 논리보다 정서의 설득력이 있다. 어머니를 향한 존중, 늙음에 대한 이해, 자식으로서의 미안함이 절제된 문장 사이로 배어난다. 독자로 하여금 ‘나도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를 되묻게 만든다. 
책의 중간중간 삽입된 수채화 그림도 주목할 만하다. 풍경과 정물을 담은 그림들은 그 자체로 수준급이다.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라 말하지만, 단지 재능 이상으로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과 내면의 균형이 느껴진다. 글과 그림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수필들 사이에는 친구, 가족, 동료와의 기억이 자주 등장한다. 청탑회, 전우회, 61학번 모임 같은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깊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동기들과의 우정은 저자가 삶을 지탱해온 또 다른 축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공동체란 크든 작든 간에 인정과 의리로 살아가는 정겨운 집단”이라 말한다. 어떤 사상적 수사보다 더 설득력 있는 말이다.
이정구 동문은 전기공학도로 시작해 한국전력, 대우건설, 한양 등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이란, 나이지리아, 리비아 등지에서 해외사업을 진두지휘한 경험도 책 곳곳에서 짧게 언급된다. 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시간, 즉 은퇴 후의 시간이야말로 오늘의 그를 만든 또 다른 퇴적층임을 담담히 보여준다.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