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호 2025년 8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1968년 네이처에 한국인 첫 논문…93세인 지금도 논문 씁니다
평생 방사선 및 온열치료 연구, 11년간 국제원자력기구 고문, 모교 화학과에 10만 달러 기부, 6.25 전쟁 때 파편 몸에 남아, 건강 비결은 매일 온열 목욕
1968년 네이처에 한국인 첫 논문…93세인 지금도 논문 씁니다

평생 방사선 및 온열치료 연구
11년간 국제원자력기구 고문
모교 화학과에 10만 달러 기부
6.25 전쟁 때 파편 몸에 남아
건강 비결은 매일 온열 목욕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은 18세의 학도병은 척추에 파편이 박힌 채 전장을 떠났고, 이후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대한민국 1호 국비 원자력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방사선생물학을 전공했다. 미네소타대학교 교수로 60여 년간 방사선 암 치료의 길을 연구하며, ‘네이처’지를 비롯해 유수 학술지에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인 방사선생물학자가 됐다. 송창원(화학53·사진) 동문 이야기다. 93세가 된 지금도 논문을 쓰고 골프를 즐긴다는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일과가 어떻게 되십니까?
“보통 날은 아침 6-7시에 기상하고 밤 12~1시에 취침합니다. 학교 연구실은 아직 유지하고 있으나 일은 대부분 집에서 하고 있고요. 저는 실험은 직접 하지 않고 미국이나 한국의 옛 제자들과 공동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실험이 있으면 그들에게 부탁하고 얻은 결과를 가지고 같이 논문을 씁니다. 논문 한 편이 곧 발표될 예정이고 또 하나의 논문이 금년 내에 완성될 예정입니다.”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매일 아침 뜨거운 물에 10~15분간 전신을 담급니다. 혈류 순환이 좋아지고 면역력도 강해집니다. 이후 야채주스를 직접 갈아 마시고요. 여름에는 골프를 1주에 2~3회 치고 겨울에는 1주에 4~5일 6000보를 실내에서 걷습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덕목은 무엇인가요?
“가정의 행복을 소홀하지 않으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입니다. 연구와 가정생활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지요. 그 대신 저, 개인을 위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을 삼갔어요. 골프도 아이들이 다 성장한 후에 아내와 시작했지요.”
그의 몸에는 전쟁 당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포탄의 파편을 맞고 허리 부위를 다쳤지만 생명은 건졌다. 군의관은 수술을 포기했다. 파편이 척추에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후 70년 넘게 그는 그 파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파편이 X선에 포착돼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소위 임관까지 했습니다. 그 시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때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매 순간을 살았습니다. 현리전투에서 적과 마주쳐 기관총 벙커를 공격하다 주위의 부하들이 쓰러지고 저도 부상 당한 전투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최근 여러 나라의 전쟁을 보면서, 정치 지도자들이 일선 병사의 입장에 선다면 그렇게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명 역시 귀중한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없으셨습니까?
“전우가 내 옆에서 쓰러지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전쟁 후에는 큰 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했지요. 전쟁은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그는 산골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과학자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학으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당시 실험실은 텅 비어 있었고, 필요한 시약과 기구는 직접 마련했다. 밤에는 야간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낮에는 실험실에서 논문을 썼다. 고려대 대학원 시절에는 대한화학회지에 3편의 논문을 실었다.
-그 시절, 과학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내셨습니까?
“주위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요. 가난했고, 가족도 돌봐야 했고, 교사로 계속 일하면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접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밤낮없이 공부했고요. 서울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석사를 고려대에서 하셨는데, 서울대서 계속 공부하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서울대에는 이미 많은 선배가 대학원에 진학해 있었고 대학원을 마친다 해도 서울대 교수가 되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그때 고려대 화학과에서 대학원 1기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새로 생긴 대학원에 1기로 들어가면 졸업 후 그곳에 남아 장차 교수가 될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고려대 화학과 대학원 1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원자력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 유학을 떠났다. 영어는 물론, 학문적 수준도 부족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배운 인내로 모든 난관을 넘었다.
-유학 초기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영어가 가장 힘들었어요. 대화는 물론 수업 따라가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지요. 중간에 귀국할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버텼습니다. 그때 배운 것은,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1968년 그는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주제는 동물세포의 DNA 합성 시간 측정이었다. 그는 Autoradiography 기법을 응용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고, 이로써 세계 과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DNA가 복제되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실험을 통해 세포가 DNA를 복제하는 데 8~9시간 걸린다는 사실을 밝혔냈지요. 이 결과를 ‘네이처’에 보냈고, 무리 없이 게재됐어요. 당시엔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이후 그는 방사선 생물학에 집중했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 국제원자력기구(IAEA), 북미온열학회 등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다. 정의방사선치료(SABR), 온열치료 등에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암세포의 혈류 환경에 주목했고, 정밀한 방사선 조사를 통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정의방사선치료는 기존 방식과 어떻게 다릅니까?
“과거에는 암에 매일 소량씩 30~50회 방사선을 쐈어요. 이제는 CT와 MRI로 정확히 암의 위치를 파악하고, 고용량 방사선을 짧은 횟수로 집중 조사합니다. 암 주변 정상 조직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온열치료는 어떤 방식입니까?
“암세포를 42~43도로 가열하면 암조직의 혈관이 손상되고 세포가 괴사합니다. 미온으로 가열하면 혈류가 증가해 산소와 약물 전달이 잘 되고 방사선 치료 효과도 높아지죠. 제가 제시한 이론은 처음에는 회의적 시선을 받았지만, 지금은 임상에서도 검증되고 있어요.”
그는 후학 양성에도 열정을 쏟았다. 1980년대, 방사선치료 인프라가 부족했던 한국의 20여 명의 유학생을 가르치며 국내 방사선 암 치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들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파견된 사람입니다. 비록 유학 후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도 바뀌는 바람에 귀국해 봉사할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국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나의 능력껏 한국의 방사선 치료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힘써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다 않고 기꺼이 할 것입니다.” 그는 최근 모교 화학과에 장학금 1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기부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서울대는 제 인생의 뿌리입니다. 90 인생에서 4년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지요. 감사한 마음에 기부했어요. 그 돈은 ‘송창원 강연 프로그램’으로 쓰인다고 들었습니다. 9월 초 서울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후배 연구자들에게 강조해온 덕목이 궁금합니다.
“투명함과 진실함입니다. 논문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하지요. 거짓 데이터는 연구자 개인뿐 아니라 학문 전체를 해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드러나요. 과학자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과학자에게 필요한 자질을 말씀해주신다면.
“호기심, 상상력, 인내심, 소통 능력, 예술적 감수성, 한 우물을 파는 자세. 이 여섯 가지를 꼽고 싶어요. 연구 분야를 쉽게 바꾸지 말고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충실해야겠지요.”
그는 지금도 하루 5시간 이상을 글쓰기에 투자한다. 전쟁을 겪고 과학자의 길을 걷는 동안, 늘 기록하고 정리했다. 그의 책 ‘나는 6.25의 학도병 그리고 과학자 송창원입니다’에는 당시의 기억이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인생의 전환점마다 그는 기록을 남겼다.
-전쟁과 학문을 함께 돌아본 회고록을 쓰신 이유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 과학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코로나로 연구실이 닫히며 시간이 생겨 쓸 수 있었지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책에 ‘나는 불과 5년 동안 다섯 개의 정부 아래서 살아야 했던, 역사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구한 운명의 소년이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광복 80돌을 맞았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8₩15해방 후의 수년간의 좌익과 우익의 투쟁을 상기 시킵니다. 정치인들은 최선의 합의점을 찾아 자기들의 욕망을 버리고 국민을 위한 국가 운영에 힘써 주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를 위한 책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조국의 지원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는 동문들에게도 한가지를 당부했다. “미국 대학들은 동문회의 힘이 큽니다. 서울대 동문들도 모교 발전에 더 큰 역할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김남주 기자
약력
△1932년 강원도 춘성군 내평리 출생 △1950년 학도지원병으로 6.25 참전 △1951년 육군종합학교 25기생으로 입교 및 소위 임관 △1952년 의병 제대 △1957년 서울대 화학과 졸업 △1959년 고려대 대학원 화학과 졸업(석사) △1959년 국비 원자력 유학장학생으로 유학 △1964년 아이오와대 이학박사(방사선생물학) △1969년 버지니아 의대 방사선과 조교수 △1970년 미네소타 의대 방사선치료과 조교수 △1987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 고문(11년간) △ 1988년 미국국립보건원(NIH) Merit Award △1991년 중국 시안암센터 방사선치료과 명예교수 △1994년 북미온열학회 회장 △2000년 북미온열학회 유진 로빈슨상 수상 △2001년 미네소타대 의료원장 우수교수상 △2006년 미네소타대 은퇴, 명예교수 임명 △2008년 국제온열학회 스가하라상 수상 △2014년 한국원자력의학원 고문 △2016년 대한민국호국영웅 기장 수여 △2019년 미주 서울대 총장 학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