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호 2025년 7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외과 의사이자 성악가·수필가·정치가…“향기로운 삶을 향하여”
외과 의사이자 성악가·수필가·정치가…“향기로운 삶을 향하여”


박성태 (의학58·의학 박사) 대한의사협회 고문




위) 정진우 교수와 함께한 제5회 독창회. 아래) 파바로티와 환담
박성태(의학58·사진) 대한민국헌정회 원로위원은 평범한 삶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를 거둔 동문이다.
외과 의사이자 성악가, 수필가이며, 한때는 국회의원으로까지 활약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박애의 정신이 바탕이 됐고, 이는 헌혈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기여로 나타났다.
박 동문은 “제 삶의 모든 길은 결국 박애와 베풂을 향해 있다”고 말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단지 명예와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어려운 이웃들에게 손을 내미는 길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룬 그의 업적들은 지금까지도 사회에 따뜻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을지로 라칸티나에서 박성태 동문을 만나 그의 삶을 청해 들었다.
지방 헌혈 운동의 선구자
박 동문이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었던 6.25 전쟁이었다. 피난 행렬 속에서 홀로 남아 피 묻은 가운을 입고 수많은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모습은 어린 박성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는 “그때 보았던 의사의 모습이 지금도 제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 박애란 그런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꿈은 결국 의과대학으로의 진학으로 이어졌고, 서울 의대에서 외과전문의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의사가 된 그는 1971년 진해해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베트남전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의 절박한 상황을 맞았다. 수술에 필요한 혈액이 턱없이 부족하자 그는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을 활용해 헌혈 권장 자선 독창회를 기획했다. 그는 이때를 떠올리며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진해와 마산에서 네 차례 개최된 독창회는 큰 성공을 거뒀고, 그 후 서울에서 세 차례 더 열렸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이었으며, 헌혈 운동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과 헌혈공로상을 받으며 ‘지방 헌혈 운동의 선구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가 시작한 헌혈 운동은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사회 전반에 헌혈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따뜻한 미성…독창회 7회 개최
박 동문은 음악을 ‘운명’이라고 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릴 적부터 집안의 분위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께서는 화가셨는데, 틈틈이 바이올린을 켜시곤 했지요.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자라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어요.” 집안에 쌓여있던 클래식 LP판 또한 그의 음악의 중요한 자양분이 돼주었다. 또한 마산중학교 시절 제갈삼 은사님의 권유도 음악적 진로를 꿈꾸게 한 중요한 계기였다. 그는 마산고 시절 레코드 감상회인 청운음악회를 조직해 우리 가곡의 개창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박 동문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그런 운동들이 좀 더 성공리에 확대됐다면 최근 불기 시작한 한국 가곡 붐이 일찍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 든다”고 말했다.
서울로 올라온 후 한양대 음대 성악과장 김호성 교수에게서 발성을 지도받았다. 매일 진료가 끝난 후에도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몰두하며 성악가로서의 실력을 다졌다. 한국음악협회의 정식 성악가로 인정받은 그는 총 일곱 번의 독창회를 개최했다. 특히 국립극장에서 서울음대 정진우(의학45) 교수의 피아노 반주로 오페라 ‘라보엠’의 아리아를 부른 무대는 당시 음악계의 큰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이 무대를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고 했다.
또한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최초 내한 시 영접과 인터뷰를 담당하면서 깊은 친분을 쌓았다. 파바로티는 박 동문의 성악적 수준에 놀라며 친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방문 시마다 박성태와 교류하며 앙콜곡 선정까지 함께 의논했다. 그는 파바로티와의 만남에 대해 “파바로티와 나눈 음악적 교감은 지금도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의 음악적 공헌은 2021년 한국음악협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는 결실을 맺었다. 그는 음악이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라고 믿고 있다. 현재 한국음악협회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수필집 ‘소야곡’ 범우에세이선 110
수필가로서의 활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서울대 김태길(철학46) 교수와 함께 수필문우회에서 활동하며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야곡’은 난치병을 앓는 소년의 치료 과정을 담은 실화로, 의료인의 박애 정신을 감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그 아이와의 만남과 이별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수필을 통해 그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KBS 의학드라마 ‘소망’으로도 방영됐으며, 그는 이 수필로 제18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야곡’은 문학평론가 신동한 씨로부터 그해 가장 감명 깊은 수필이라는 평을 들었고, 당대 최고의 수필가들의 글을 엄선하는 ‘범우에세이’ 110번째 선집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수필문우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에 이사나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쓰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제12대 국회의원으로 의료법 개정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보사분과위원과 재해대책위원장을 맡은 그는 의정활동에서도 남다른 성과를 올렸다. 박 동문은 “썩은 곳을 도려내는 외과의사인 만큼 사회의 어둡고 병든 곳을 수술하기 위한 것이 정치 입문의 동기였다”고 했다. 보사분과 국회의원으로 의료법 개정안을 주도해 의료인의 면허 취소 기준을 합리적으로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
노태우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하고 대한의사협회 고문이기도 한 그는 현재 의료계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필수의료 및 응급의료는 반드시 국가가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며 “무리한 정책 추진은 오히려 부작용만 키울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사회적 정의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정책 추진이 절실하다고 믿고 있다.
박성태 동문의 가족 역시 그의 다재다능함을 이어받았다. 부인은 약사, 장남은 피부과 전문의, 차남은 회사 중역, 삼남은 영화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배우 박상민이다. 가족은 그에게 또 다른 자랑이며 힘의 원천이다. 그는 가족의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박 동문은 ‘향기로운 삶, 베푸는 삶, 감사하는 삶’을 지향한다며 생활신조로는 ‘성실, 합리, 신의’를 꼽았다. 그는 평생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이제 주어진 만큼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낸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현역인 그는 최근에는 언양 아하브 요양병원 원장으로 부임하며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김남주 기자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