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68호 2025년 7월] 뉴스 포럼

“법적 사고력 갖춘 나라가 경쟁력 있다”

'트럼프, AI… 국제규범의 리셋’ 국제질서 격변 속, 한국 역할 제시
“법적 사고력 갖춘 나라가 경쟁력 있다”


이재민 (법학87)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

'트럼프, AI… 국제규범의 리셋’
국제질서 격변 속, 한국 역할 제시
“지금은 국제사회가 격동하는 전환기입니다. 한국은 ‘룰 메이커’가 아닌 ‘룰 테이커’로 살아남을 전략을 모색해야 하며, 동시에 새로운 질서 형성에 적극 참여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7월 2일 오전 마포 공덕동 SNU장학빌딩에서 열린 수요특강에서 이재민(법학87)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이같이 강조했다. ‘트럼프, AI, 반도체와 국제규범의 리셋’을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는 90여 명의 동문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 원장은 최근 국제통상 질서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국가 안보 프레임의 확산’을 들었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주요 산업 품목에 대해 국가 안보를 이유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규범을 통해 질서를 만들던 기존 방식에서 힘과 통제를 앞세운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미국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중국, EU, 일본, 한국 등 주요국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WTO 기능 마비, 기술 패권을 둘러싼 규범 경쟁 등 다양한 갈등 요소들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며 “이러한 격변의 국면에서 한국은 외부 충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간국’으로서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관세 자체의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존 규범을 흔들며 새로운 게임의 룰을 쓰고 있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이 변화의 본질을 직시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강연에서 이 원장은 국제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틀을 세운 전환점으로, 현재 197개국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는 400년간 이어진 규범의 결과물”이라며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제관계는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있고, 신냉전 구도가 본격화되며 국가 간 법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혼돈 속에서 국익을 감정이나 직관이 아닌, 규범에 근거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분쟁 양상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이 원장은 “미국은 넷플릭스, 구글 등 자국 IT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디지털 콘텐츠에 관세를 부과하지 말고,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을 제한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다”며 “반면 중국은 개인정보 보호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데이터 이전을 제한하고 해외 사이트를 차단하는 등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EU는 미국과 중국의 중간 입장을 취하며 전자상거래는 자유롭게 하되, 개인정보 보호는 엄격히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디지털 시대의 격차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WTO, OECD, GATT 등 국제기구들이 협력해 새로운 디지털 규범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상품을 수출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규범과 가치를 기반으로 경쟁하는 시대”라며 “AI 윤리, 디지털 통상, 공급망 안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 기준과 원칙을 제안하고 관철해나갈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강연 말미에는 북한 핵 문제와 중국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NPT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회의가 커지고 있으며, UN 체제 개편 논의와 함께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통제 질서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과의 협력은 양자기술 등 민감 분야를 제외하면 여전히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외국 기업들의 탈중국화 흐름 역시 한국의 선택지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끝으로 “국제사회에서 경쟁력 있는 국가란, 외교력과 안보 역량뿐 아니라 규범을 해석하고 설계할 수 있는 법적 사고력을 갖춘 나라”라며 “젊은 세대가 국제법의 흐름을 이해하고, 다자 체제 안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과 투자도 함께 병행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연에 참석한 한 동문은 “국제법이 이렇게 현실 정치와 경제에 직접 연결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며 “앞으로 국제규범을 읽는 눈을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국제정세 속 한국의 입지를 법의 관점에서 풀어준 점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은 조기 마감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모았으며, 참석자 전원에게는 이재민 교수의 저서 ‘지배의 법칙’과 함께 다과가 제공됐다. 사회를 맡은 송우엽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국제정세 변화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준 강연이었다”며 “앞으로도 총동창회가 지식과 현실을 잇는 플랫폼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전했다.
송해수기자